서광제
Seo Gwang-je / 徐光霽 / 1906  ~ 
대표분야
감독,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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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군용열차 (서광제, 1938)
배우 :
지지마라 순이야 (남궁운, 1930)
유랑 (김유영, 1928)

주요경력

1928년 조선예술영화협회 작품인 〈유랑〉에 출연하면서 영화계 입문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회원 가입
조선시나리오라이터협회 창립회원
1930년 영화평론활동 시작. "영화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임무", "나치즈 독재 이후 독일의 영화계", "영화의 리얼리즘", "조선영화의 전망" 등 기고
1931년 <화륜> 공동 각색을 통해 시나리오 창작 시작
일본 동활(東活)키네마 각본부 부원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 이사
1939~40년 일본 동보(東寶)영화사 촬영소에서 영화 연구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
1940년 "신체제와 영화" 발표, 조선영화령의 정당성 옹호
1945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48년 월북

기타정보

기타이름
타츠시로 히카리하, 達城光霽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안종화, 김을한 등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연구생으로 들어가면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한 작품은 1928년의 <유랑>이었다. 김유영의 감독 데뷔작이었다. 임화 주연의 이 작품에 서광제도 배우로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강호 감독의 <지지마라 순이야>(1930)에도 출연하였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키노로 개편하고 제작한 <화륜>(1931)에서는 각본과 편집을 맡았다(동아일보b). <화륜>의 각본은 안석영, 이효석, 서광제, 김유영이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를 만든 후 <<중외일보>>에 공동으로 연재했던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었다(동아일보c). 평론가로서 서광제는 조선 영화를 비평하고, 외국의 이론을 소개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동아일보에 러시아 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개하거나, 조선 영화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평하는 글을 실었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카프의 강경파인 임화와 대립하면서 카프를 탈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영화 기업화론으로 전향하고 할리우드의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의 미학에 입각하여 평론활동을 하였다(대중예술인 사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광>> 등에 그의 평론이 다수 남아있다.
1932년 김유영과 함께 영화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유영은 감독부, 서광제는 각본부에서 공부할 예정으로 출발하였다(동아일보f). 언제 돌아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1933년 10월에는 연극배우 김선초와 결혼하였다(동아일보g). 1938년 성봉영화원과 일본 도호가 합작하여 제작한 <군용열차>의 감독을 맡았다. 제3국의 스파이에게 매수된 군용열차의 차장이 죄과를 뉘우치고 스파이를 일망타진하여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내용의 군국주의 영화였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차용하여 만들었다(대중예술인 사전). 1939년 고려영화사에 입사하여 차기작 <북풍>을 준비했지만 개봉하지는 못했다(동아일보h). 1939년에는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의 평의원을 맡았다(일제협력단체사전). 해방 후에는 카프 경력을 바탕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공간에서의 영화운동을 주도해 가는 양대 축으로서 강경파인 추민과 논쟁을 벌였다. 추민은 영화 동맹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서광제는 좌익소아병과 정치소아병을 비판하고 영화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통한 영화 동맹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한국영화사연구). 이후 월북하였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8년 2월 10일 3면.
동아일보b 1930년 10월 8일 5면.
동아일보c 1931년 8월 2일 5면.
동아일보d 1931년 9월 7일, 11일, 13일, 16일, 17일, 18일, 20일, 23일 5면.
동아일보e 1931년 8월 24일 4면.
동아일보f 1932년 5월 15일 5면.
동아일보g 1933년 10월 5일 6면.
동아일보h 1939년 11월 14일 5면.
경향신문 1957년 3월 2일 4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1년 서울 출생으로 동대문상업학교를 나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다. 이후 일본 동경의 명치대학에 들어 갔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 여러 신문사와 관계하며 영화에 관한 글을 썼다. 1927년 안종화, 이경손 등이 발족한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부에 김유영, 임화 등과 함께 들어가 일 년 동안 영화교육을 받았고, 이들의 주도 아래 협회를 사회주의 영화운동체인 카프(KAPF)의 조직으로 전환시켰다. 1928년 카프의 첫영화 <유랑>(김유영 감독)에 임화 등과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 일선에 등장. 김유영 감독의 세 번째 작품 <화륜(火輪)>(1931)에서는 공동각색과 편집을 맡기도 했다. 아울러 카프 진영의 이론가로 나선 <러시아 명감독 에이젠슈테인의 강연>(동아일보·1930. 9. 7~23)을 소개하는가 하면, <영화비판과 각본>(조선일보·1933. 10. 10~21) <영화의 원작 문제>(조광·1936) <영화문화론-최근 조선영화기업의 변태성>(조선일보· 1938. 9. 2~7) <조선영화계총평>(조광·1939. 12) 등을 발표하여 영화평론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는 성봉영화원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공동 제작한 <군용열차>(1938)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일제의 군용열차 차장이 제 3국의 스파이에게 매수되었으나 그 죄과를 반성하여 자수함으로써 스파이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군용열차를 위기에서 구해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케 한다는 내용, 이규환 원작, 기꾸지(菊池盛史) 각색, 왕평·문예봉 주연인 이 영화는 사실상 친일 어용영화 시대를 여는 씁쓸한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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