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Lee Myeong-u / 李銘雨
출생·사망
1901 ~
대표분야
촬영, 감독, 편집, 제작/기획, 후반작업,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40

필모그래피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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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명우, 1939)
홍길동전(후편) (이명우, 1936)
춘향전 (이명우, 1935)
홍길동전 (김소봉,이명우, 1935)
월남 이상재선생 장례식 실황 (이명우, 1927)

주요경력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
미군정 502대 부대에서 촬영기사로 활동
공보처 소속 촬영기사로 활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납북

기타정보

기타이름
뇌호명 (瀨戶明), 세토 아키라 (Akira Se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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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이명우는 1927년 김해운 감독의 <운명>을 촬영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같은 해 조선키네마에서 제작한 <금붕어>의 촬영을 가토 교헤이(加藤恭平)와 공동으로 담당했으며,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잘 있거라>의 촬영을 담당하였다(조선일보a; 동아일보a; 동아일보b). 다음 해에는 김영환이 감독한 <세 동무(삼걸인)>의 촬영, 현상, 편집을 맡았다. 1930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나운규 감독의 <철인도>의 촬영과 편집을 담당했다(대중예술인 사전; 동아일보c). 1935년 <은하에 흐르는 정열>의 촬영을 담당하였고, <춘향전>의 연출과 촬영을 맡았다(조선일보b; 동아일보d; 대중예술인 사전). 이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 <수업료>(1940), <복지만리>(1941), <조선해협>(1943) 등의 작품에 관여하였다. 해방 후 박기채 감독의 <밤의 태양>(1948)의 촬영을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7월 1일 3면.
동아일보b 1927년 10월 12일 3면.
동아일보c 1930년 4월 14일 1면.
동아일보d 1935년 8월 15일 3면.
조선일보a 1927년 6월 30일 조간 2면.
조선일보b 1935년 8월 11일 석간 3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예명 명우. 1901년 서울 중구 을지로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인 이필우의 아우이기도 하다. 1926년 서울의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촬영술을 익히고 1927년 <운명>(전해운 감독)의 촬영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입문. <장화홍련전>(1936),<오몽녀>(1937)등 24편의 영화를 찍고, 형 이필우의 녹음 기술과 함께 이루어 낸 <춘향전>(1935,최초의 발성영화)을 비롯 <홍길동전 후편>(1936),<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등 3편의 감독 작품을 내놓았다. 오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의 기구한 운명을 다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차홍녀,황철 주연)은 배우 문예봉의 남편인 임선규 각본(월북)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는 무성영화 초기 조선인 촬영기사라고는 4명밖에 안되던 시절, 이 대열에 합류하여 <밤의 태양>(1948)의 촬영을 끝으로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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