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손
Lee Gyeong-son / 李慶孫
출생·사망
1905 ~ 1977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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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
춘희 (이경손, 1928)   
숙영낭자전 (이경손, 1928)   
장한몽 (이경손, 1926)   
봉황의 면류관 (이경손, 1926)   
심청전 (이경손, 1925)   
개척자 (이경손, 1925)   

주요경력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무대예술연구회 조직하여 서울을 비롯 지방순회공연
1924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기진으로 입사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 단원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 해체 이후 고려키네마 창립
1926년 계림영화사 창립
1926년 《조선일보》에 영화소설 <백의인> 연재
1929년 단성사주 박승필의 도움으로 이경손프로덕션 창립
1931년 상해로 망명
1932년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태국으로 탈출하여 여생을 보냄

기타정보

기타이름
李敬,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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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4년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며 영화경력을 시작하였다. <해의 비곡>(1924)과 <운영전>(1925)에서는 감독보조를 맡아 영화연출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윤백남이 서울에서 윤백남프로덕션을 결성하자, 윤백남을 따라 조선키네마를 탈퇴하였다. 윤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1925)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여러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김종원).
이경손은 연출 이외에도 각본에 관심을 보였다. 1925년에는 연극문학과 무대예술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극문회(劇文會)에 고한승, 김영팔, 심훈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라디오 방송에 적합한 각본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라디오드라마 연구회에도 김영팔, 심훈, 최승일, 고한승 등과 함께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a; 조선일보a).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본원작의 <금색야차>를 개작한 <장한몽>(1926)을 들 수 있을 것이다(동아일보b).
그리고 1927년에는 정기탁, 김동평 등이 세운 평양키네마에서 제작한 <춘희>의 감독을 맡았다. 1928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뒤마의 소설을 번안하여 만든 작품으로 정기탁과 신인여배우 김일송을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였다(동아일보c). <춘희>를 촬영하는 도중에 이경손은 이경손프로덕션을 창립하며 독립하였다. 이경손프로덕션의 지휘는 박창혁이었으며, 촬영기사는 한창섭이 맡았다고 한다. 제1회 작품은 조경희 주연의 <숙영낭자전>이었다. 이경손은 이 작품을 오랫동안 생각해 두었던 것으로, 이 작품을 위해 조선가무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조선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조선일보b; 동아일보d; 동아일보e). 참고로 이경손이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에 관훈동에 ‘카카튜’라는 커피를 파는 다방을 운영하였는데, 이 다방이 서울 다방계의 효시가 되었다는 회고가 남아 있기도 하다(경향신문).
이후 상해로 옮겨간 이경손은 전창근이 원작, 각색, 주연을 담당한 <양자강>(1931)의 감독을 맡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이 국민당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되었다고 한다. 1931년 <양자강>은 조선극장에서 수입하여 개봉하였다(김종원). 그리고 1931년에는 상해에 있으면서, 상해에서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김광주 등과 함께 연락하여 프롤레타리아 문예잡지 신흥문단을 발간하려는 계획에 관여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f). 하지만 그는 1932년 윤봉길의사 사건 이후 상해를 떠나 태국으로 옮겨가서 1977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김종원; 대중예술인 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9월 14일 2면.
동아일보b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c 1927년 11월 16일 3면.
동아일보d 1928년 3월 8일 3면.
동아일보e 1931년 8월 1일 5면.
동아일보f 1931년 10월 28일 5면.
조선일보a 1927년 7월 3일 조간 3면.
조선일보b 1928년 3월 8일 석간 3면.
경향신문 1949년 9월 19일 2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4년 개성 출생. 체신국 부설 상성학교를 나온 뒤 교토의 동지사대학 분교라는 경성신학원에서 2년 동안 종교론과 윤리학,사회학 개론을 공부하며 그당시 유명한 서양철학자 김난수 댁을 드나들었다. 이후 무대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참여하고 예술학원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 입사. 일본인 왕필렬 감독의 <해의 비곡>조감독을 거쳐 1925년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감독보조 일을 보았다. 감독으로 정식 등장한 것은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만든 윤백남 프로덕션의 <심청전>(1925)을 통해서였다. 이때 그는 나운규라는 걸출한 인물을 주연급으로 발탁, 뒷날 한국영화의 토대를 이루게 했다. 같은 해 이광수 원작 <개척자>(각색,감독-고려키네마)를 필름에 담아 근대소설을 처음으로 영화화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어 1926년에 작가 심훈을 배우로 기용하여 만든 <장한몽>(1926,계림영화협회),활극장르를 개척한 <산채왕>(1926,계림영화협회), 언니와 사랑에 빠진 열다섯 살 소년을 맞게 된 평양기생(신일선)이 애인을 위해 기를 쓰고 버텨보나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는 <봉황의 면류관>(1926,정기탁 프로덕션)을 발표하며 왕성한 역량을 발휘했다. 여류시인 김명순을 기용하여 만든 알렉산더 듀마 원작 <춘희>(1928,평양키네마),선당에 사는 숙영낭자와 배선군의 사랑을 시샘하는 시비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으나 옥황상제의 배려로 되살아나는 전설적인 야사 <숙영낭자전>(1928,이경손 프로덕션)과 <양자강>(1931,중국 고성영화공사)등 8편을 감독했다. 이 가운데 <봉황의 면류관>과 <춘희>는 "어느 정도 시정이 풍기는 작품으로서 화면이 대단히 아름다웠고 양심적인 작품으로서 예술성을 알리려고 애쓴 흔적이 인다."(안종화,한국영화사 40년약사)는 평을 들었다. <양자강>(원작,각색,주연-전창근)은 1928년 우여곡절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내놓은 작품이다. 사랑하는 처녀가 지주에게 겁탈당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간 젊은 농민이 국민 혁명군에 가담하여 북벌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상해에 들어와 양자강 양안을 오르내리며 걸식을 하던 중 쓰러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국민당 당국은 이 영화에 국민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구실로 상영을 허가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을 모아 무료관람을 시켰다. 1931년 5월 1일 조선극장에서 수입 개봉한 이 영화에 대해 김을한(매일신보,1931.5.3~9)은 "<양자강>의 스케일은 너무나 크다. 내용에 다소 공허한 감이 없지 않으나 혼돈,또 복잡한 현하중국의 어떤 일면을 보여주는 점으로는 누구나 한 번 볼만한 영화."라고 평하했다. <양자강> 발표 이후 그는 태국으로 옮겨 영어 교사생활을 10여 년동안 하다가 군용차 수입 중개업을 했다. 방콕에서 한국교민회장을 역임.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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