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웅
Yang Se-ung / 梁世雄
출생·사망
1906 ~
대표분야
촬영, 편집
활동년대
1930, 194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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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키네마 입사
1932년 동아키네마 카메라맨으로 승진
1935년 귀국
1940년 조선인영화협회 창설 당시 평의원
1941년 조선인영화협회 이사
1949년 문교부예술위원회 영화위원
한국전쟁 중 실종. 납북된 것으로 추정

기타정보

기타이름
三原世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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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2년 일본 동활영화주식회사촬영소(東活映畵株式會社撮影所)에서 촬영기술을 연구하던 양세웅은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로 승격하였다. 최초 작품으로 삼성토시부(三星吐詩夫) 감독의 <사랑(愛)>을 촬영하였다(동아일보a; 조선일보). 이 영화의 정확한 제목은 <사랑에 목마른 거리(愛に餓ゆる街)>(1931)이다. 1935년 귀국하여, 박기채 감독의 <춘풍> 촬영으로 조선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군용열차>(1938), <새출발>(1939), <반도의 봄>(1941) 등 여러 영화의 촬영을 맡았다. 1937년 1월에는 김유영, 안종화, 박기채 등과 함께 영화월간잡지 영화보(映畵報)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위원을 맡았다(동아일보b). 1940년 2월 개최된 조선영화인협회 제1회 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동아일보c). 해방 후의 작품으로는 <안중근 사기(史記)>, <똘똘이의 모험>(1946), <그들의 행복>, <민족의 새벽>(1947) 등이 있다. 1949년에는 문교부예술위원회의 영화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경향신문).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고 전해진다(자료원).

* 참고문헌
조선일보 1932년 4월 10일자 석간 4면.
동아일보a 1932년 4월 7일자 4면.
동아일보b 1937년 1월 29일자 5면.
동아일보c 1940년 2월 19일자 5면.
경향신문 1949년 2월 19일자 3면.
한국전쟁납북자료원(http://www.kwari.org/)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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