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영
Lee Guyeong / 李龜永 / 1901  ~  1973
대표분야
시나리오, 감독, 제작/기획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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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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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삼일혁명기 (이구영, 1947)
의사 안중근 (이구영, 1946)
갈대꽃 (이구영, 1931)
수일과 순애 (이구영, 1931)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
승방비곡 (이구영, 1930)
낙화유수 (이구영, 1927)
쌍옥루(전후편) (이구영, 1925)

주요경력

1920년 일본 오사카 매일신문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함
1923년 5월 귀국 후 일간지에 영화관련 글 기고
1924년 11월 27일 조선배우학교 설립
1925년 겨울 단성사 입사, 촬영부 및 선전부 담당

기타정보

저술내역
「조선영화계의 과거ㆍ현재ㆍ장래」, 조선일보, 1925.11.23~12.7
「사건으로 본 영화계 이면사」, 『영화예술』, 1970년 11월호~1971년 12월호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오사카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5월 귀국하여 일간지에 필명인 이홍원으로 영화관련 글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1924년 <장화홍련전>을 통하여 각본가로 데뷔했다(김종원). 같은 해에 이구영은 현철과 함께 조선배우학교를 설립을 준비하였다. 조선배우학교는 서울 종로구 와룡동 72번지 변사 김덕경의 집 2층에 설립되었다. 학교는 약간의 입학금 외에 수업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강사는 현철과 이구영이었다. 1기로 입학한 학생들은 복혜숙, 이금룡, 왕평, 박제행 등이었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김종원).
<장화홍련전>의 성공에 힘입어 이구영은 이필우와 함께 고려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쌍옥루>(1925)를 기획, 제작했다(조선일보a). 김택윤, 조선권번 기생 김소진을 남녀 주인공으로 한 <쌍옥루>는 촬영 기한이 길어져 배우가 추가 개런티를 요구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후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입사하여 나운규의 <아리랑>, <금붕어> 등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의 홍보를 담당했다(대중예술인 사전). 1926년에는 단성사 촬영부를 설립하여 <낙화유수>를 만들었다(조선일보b). 이구영의 동생인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의 주제가 <강남달>도 큰 인기를 끌었다(김종원). 이구영은 1926년 변사, 악사, 영사기사 등 극장 종사자들을 모아 삼우회를 만들고, 1927년에는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참여했으며, 1931년에는 영화인 친목단체 청족회를 구성하는 등 당시 영화계에서 중심적 인물로 활동했다(대중예술인 사전).
1930년대에는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30), <수일과 순애>(1931), <갈대꽃>(1931) 등의 각본, 연출을 맡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뚜렷한 활동 기록이 드러나지 않다가 해방 이후 윤봉춘과 함께 계몽문화협회를 세우고 <안중근사기>, <삼일혁명기>, <유관순> 등의 영화 연출 및 각본을 맡았다(대중예술인 사전; 김종원).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4년 12월 13일 3면.
동아일보b 1925년 11월 22일 5면.
조선일보a 1925년 8월 24일 조간 3면.
조선일보b 1927년 8월 17일 석간 5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1년 1월 10일(음력) 서울 회현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거복(巨福). 자그마한 체구에 야무진 모습이었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교편을 잡고 있던 충무로 입구의 공옥(工玉)학교에 입학. 10명으로 제한된 예능반에 끼어 영어와 합창을 배웠다. 이때 처음 두 살 연상의 소녀에게 연정을 품고 연애편지를 쓰기도 했다. 열세 살 때 배제학당에 들어 갔는데 뒷날 문인이 된 동창생 김팔봉, 안막 등과 어울려 다니면서 처음 본 활동사진에 깊이 빠졌다. 이때 학교에서의 별명이 ‘찌프린 대장’이었다. 열여섯 살에 이르자 아예 영화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에서 나오는 영화잡지를 모아 읽는 한편 아예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무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 매일신문에 적을 두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주요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아했다. 그는 동경에 나갔을 때 본 일본영화 변사 이고마(生駒雷避)의 해설에 감탄한 나머지 그 해설을 필기하여 단성사로 보내곤 했다. 이 필기본 영화해설은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덕경, 서상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23년 5월 귀국하자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 일간신문에 본명과 예명인 이홍원(李紅園)을 내세워 영화관계의 글을 쓰는 한편, <<개벽>>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현철과 의기투합하여 ‘조선의 연극계와 영화계에 일대 혁신을 이루기 위해’ 조선배우학교의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1924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72번지 변사 김덕경의 집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다음해 복혜숙, 이금룡, 왕평, 박제행 등 12명을 제 1기생으로 배출했다.
우리 영화계는 어느새 활동사진 수입기에서 제작시대로 접어 들고 있었다. 단성사 경영주인 박승필이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춘향전>(1923)을 만들어 성공한데 자극받아 <장화홍련전>(1924)을 내놓고 다음 작품을 기획중이었다. 이구영은 단성사측에서 재정과 기재, 기술을 부담하고 배우학교측이 각본, 감독, 배우를 책임지기로 한 합작형태의 <쌍옥루(雙玉淚)>(1925)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감독으로 데뷔한다. 주연은 권번 기생이었던 김산진과 김택윤, 촬영은 이필우가 맡았다. 필름 착수가 늘어나는 바람에 전후편의 분량이 되었다. 각본도 처음 선보인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 무렵 조선일보에 10회 분량으로 연재한 장문의 글 「조선영화계의 과거-현재-장래」(1925. 11. 23~12. 7)는 오늘날 영화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이 인용할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해 겨울 그는 박승필의 요청으로 단성사에 입사하게 된다. 촬영부와 선전부 일을 맡아 연출을 지원하는 한편 극장의 선전업무를 체계화시키는데 앞장섰다. <쌍옥루>에 이은 두 번째 감독 작품은 김영환 원작, 각본인 <낙화유수>(1927)이다. 이구영의 여동생 이정숙이 불러 히트한 주제가 ‘강남달’은 1929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출시되어 많이 팔려 나갔다. 영화는 젊은 화가와 기생모델의 사랑을 그린 신파 통속극으로 복혜숙, 이원용, 정암 등 조선배우학교 출신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사용한 기재는 윌라드 카메라로 춘원 이광수가 이감독을 명륜정 자택으로 불러 방한중인 미국인 촬영기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1천 100원을 주어 단성사에서 사들이도록 한 것이었다.
잇따라 그는 정신이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간 청년 영진이 석방 후 고향에서 겪는 주권없는 민족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는 <아리랑 그후 이야기>(1930)를 나운규, 임송서 주연으로 내놓은데 이어 <승방비곡>(1930) <수일과 순애>(1931) <갈대꽃>(1931) <안중근 사기>(1947) 등을 선보였다. 그는 7편의 감독작 외에도 <춘향전>(1935)을 비롯 <유관순>(1948) <애국자의 아들>(1949) <아름다웠던 서울>(1950) <성불사>(1952) <영광의 길>(1953) <고향의 노래>(1954) 등 앞의 연출 각본을 포함 모두 16편의 시나리오를 발표하였다. 해방전에는 <낙화유수>는 물론, 이복남매간의 애틋한 비련을 그린 <승방비곡>이나 배금주의가 깔린 <수일과 순애> 등이 말해주듯이 남녀의 애정문제를 즐겨 다루었으나, 해방후에는 일제 지배 아래서의 항일이나 공산주의와의 항전을 테마로 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일제 강압의 절정기인 1936년부터 1945년 사이의 10년 동안 영화계 일선활동을 쉬었을 뿐 8. 15 해방과 더불어 활동을 재개. 연출보다 각본 집필에 주력했다. 1973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사건으로 본 영화계 이면사」를 『영화예술』지에 연재하였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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