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랑
Kim Hwa-rang / 金火浪 / 1912  ~  1977
본명
이순재 (Lee Soon-jae)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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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타잔 한국에 오다 (김화랑, 1971)
성불사의 밤 (김화랑, 1969)
식모 삼형제 (김화랑, 1969)
팔도사위 (김화랑, 1969)
남정임 여군에 가다 (김화랑, 1968)
삼등여관 (김화랑, 1967)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김화랑, 1966)
살사리 몰랐지(007 폭소판 살사리 몰랐지?) (김화랑, 1966)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김화랑, 1965)
연락선은 떠난다 (김진섭,김화랑, 1964)

주요경력

1935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회원
1936년 방송극협회(放送劇協會) 회원
1937년 주영섭 등과 함께 조선영화작가협회 결성
1938년 극연좌(劇硏座) 좌원
1941년 극단 유락좌(有樂座) 창설
1943~45년 제일악극단(第一樂劇團), 라미라(羅美羅) 악극단, 동양극장 문예부 등 소속 활동
1946년 중앙방송국 문예과
1947년 샛별악극단 창설
1951년 호화선(豪華船) 악극단 창설
1959년 반공예술인단 조직부장 역임
1960년 공연단체협의회(公演團體協議會) 회장 등

기타정보

기타이름
이익, 星野正史, 李翼
주요기타작품
1935년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
1938년 <목격자>
1939년 <도념(道念)>
<아가씨의 소원은 단 하나> 등
수상내역(영화)
1959년 제1회 영화의 날 공헌영화인 표창/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이사장 공로자 표창/
1976년 문화의 달 기념 유공영화인 문공부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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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순재(李順載), 해방 전의 예명은 이익(李翼)이다(친일인명사전, 국제영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친일인명사전). 1935년부터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소속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으며(조선일보b, 동아일보a), 1936년에는 방송극협회(放送劇協會) 소속으로 라디오 방송극 <봄 소낙이>, <연필>, <풍선동(風船同)> 등을 연출했다(매일신보a, 매일신보b). 1937년 김유영(金幽影), 김혁(金赫) 등과 함께 월간지 『영화작가(映畵作家)』를 창간했으며(동아일보b), 같은 해 제작에 들어간 반도영화제작소(半島映畵製作所) 제1회 작품 <한강>에서 방한준의 원안을 김혁과 공동 각색하면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매일신보c, 조선일보b). 이듬해 제작 개시한 제2회 작품 <성황당>에서도 각색을 맡았으며(동아일보c), 1939년에는 조선일보가 공모 심사한 “오리지날 씨나리오” 현상모집에서 <드메>로 입상하기도 했다(조선일보a). 1939년 5월 조선문화영화협회(朝鮮文化映畵協會)의 발기인으로 설립에 관여했으며(동아일보d), 같은 해 7월에 설립된 조선영화작가협회(朝鮮映畵作家協會)에 동인으로 참가했다(매일신보d). 그해에 조선문화영화협회와 일본문화영화사의 제작으로 오카노 신이치(岡野進一)와 공동 연출한 문화영화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가 감독 데뷔작이다. 이후 조선영화(朝鮮映畵) 제3회 작품 <수선화>에서 촬영을,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 제작,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에서 편집을 맡았다. 1941년 김화랑(金火浪)이라는 예명으로 극단 유락좌(有樂座)를 창설했으며(전자연표), 1943년 제일악극단(第一樂劇團)에서 연출자로 있는 동안 만난 가수 신카나리아(申璟女)와 결혼했다(동아일보e).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라미라(羅美羅) 악극단에 입단했다고 하며, 김화랑은 동양극장 문예부 소속으로 <아가씨의 소원은 단 하나>라는 작품을 직접 집필, 연출하기도 했다(동아일보e, 국제영화). 해방 후에도 악극단 활동에 주력하여 1947년 초에는 황해(黃海), 백설희(白雪姬), 신카나리아, 남인수(南仁樹) 등과 함께 샛별악극단을 창립했다(동아일보f). 전쟁기에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가협(歌協)과 제주도 제2훈련소 연예대에 부부가 함께 소속되어 위문공연을 했다고 하며(동아일보g), 이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황해, 백설희, 현인(玄仁), 박옥초(朴玉草), 주선태(朱善泰) 등 피난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악극단 호화선(豪華船)을 조직해 약 2년 동안 큰 인기를 얻었다(동아일보h). 서울 환도 후에도 한동안 악극단을 운영했으나 1957년 임화수(林和秀) 제작의 <항구의 일야>와 박구(朴九)의 권유로 맡게 된 <자유부인> 속편을 연출하면서 영화로 복귀했다(동아일보i). 이후 <사람팔자 알 수 없다>를 시작으로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 <살사리 몰랐지>, <남정임 여군에 가다>, <타잔 한국에 오다> 등 코미디 영화를 주로 연출하며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977년 방송국 프로그램 녹음 도중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동아일보j).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92년 11월 14일자 15면.
동아일보a 1935년 11월 20일자 2면.
동아일보b 1937년 6월 3일자 4면.
동아일보c 1938년 10월 25일자 5면.
동아일보d 1939년 5월 12일자 5면.
동아일보e 1981년 7월 27일자 7면.
동아일보f 1981년 8월 1일자 7면.동아일보g 1981년 8월 8일자 7면.
동아일보h 1981년 8월 10일자 7면.
동아일보i 1981년 8월 11일자 7면.
동아일보j 1981년 8월 13일자 11면.
매일신보a 1936년 5월 13일자 3면.
매일신보b 1936년 8월 16일자 3면.
매일신보c 1937년 7월 1일자 8면.
매일신보d 1939년 7월 28일자 4면.
조선일보a 1939년 3월 1일자 조간 4면.
조선일보b 1939년 3월 2일자 조간 4면.
韓國映畵人百人選, 『국제영화』제4권 제10호(1958년 12월 발행).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83-84쪽.
한국학자료센터 전자연표 http://kostma.net/history_table/history_aks.aspx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이순재(李順載). 필명은 이익(李翼). 1912년 10월 28일 서울 출생.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1937년 9월 주영섭 등과 조선영화작가협회 결성.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서 시나리오 <드메>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방한준 감독의 <성황당>(1938,주연 전택이,현순영),<한강>(1939),일제가 국책영화(어용영화)를 제작할 목적으로 만든 조선문화협회의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1939) 각색.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 공동 각색, 조감독 연출을 맡았다. 1940년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 <바다의 빛>, 1941년 최인규 감독의 문하에 들어가 <집 없는 천사> 각색. 1943년 연극단체 '유락좌'를 창단, 이때 또하나의 예명 김화랑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주로 무대공연 단체에서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이 무렵부터 그는 희극에 가까운 코믹터치에 주력, 명랑한 촌극 무대 구성에 특징을 보이는 작가로 변신하게 된다. 희극영화 작품으로는 <사랑 팔자 알 수 없다>,<한 번만 봐주세요>(1958),<홀쭉이 뚱뚱이 논산훈련소에 가다>(1959),<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1965),<살살이 몰랐지>,<남자는 절개,여자는 배짱>(1966)등이 있다. 1951년 여름 아내인 신카나리아와 악극단 '호화선' 창립. 악극 <굳세어라 금순아>(8경)를 부산극장에서 공연한다. 1954년 환도직후 영화인들이 정부의 국산영화 면세조치에 힘을 얻어 백조가극단 경영자 최일이 창설한 백조영화사의 제1회작 <항구의 일야>(1957, 최무룡, 전옥 주연)로 컴백, 그 내용은 어느 항구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보낸 마도로스 최는 카바레의 여급과 사랑을 나누며 장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떠나간 남자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지친 여급은 남자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항구의 하룻밤 풋사랑을 허무하게 느끼며 여급은 발길을 돌린다. 당시 이와같은 통속 신파극으로 <목포의 눈물>,<자장가>,<눈 나리는 밤>(1958,하한수감독)등을 꼽을 수 있는데 여주인공은 모두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전옥(全玉)이었다. 같은 해 한국연예회사가 제작한 최초의 한국 홍콩 합작영화 <천지유정>을 감독, 크게 히트. 김화랑의 영화에 대한 열정 또한 크게 고무되어 <그림자 사랑>(1958),<태양의 거리>(1959),<오형제>(1960),<울려고 내가 왔던가>(1960),<밤에만 흐르는 강>(1961),<바보 칠성이>(1961),<어머님 안심하소서>(1961),<남정임 여군에가다>(1968),<팔도 사위>(1969),<성불사의 밤>(1970)등 쉬지 않고 메가폰을 잡았다. 그러나 <대전발 0시 50분>(주연 최무룡,이민자),<밤에 우는 두견새>(주연 김진규,엄앵란),<인목대비> 등 3편을 제작했으나 흥행실패로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영화시대'발행인 박누월은 김화랑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씨는 영화의 지식인이다. 영화의 구성과 표현을 잘한다. 씨는 언제나 본격적인 예술성에 접근하려는 달콤한 감상성을 가졌다. 씨는 한 사람의 시나리오 라이터로서의 그 존재를 알리게 된 것은 <한강> 각색 이후 조선일보에 1등 당선된 시나리오 <드메>에서 일 것이다. 씨의 명랑하면서도 그 어데선가 침울한 빛이 떠오르고 또 사색적인 홍안의 표정은 씨를 대하는 그사람으로 하여금 학구적인 인상을 준다. 최근의 씨는 <성황당> 각색 후 영화 <바다의 빛>과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등의 문화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 두 가지 영화를 통해서 본다면 감독자로서의 그 각색술에는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씨는 우리 영화계의 지보이다."(조선영화인약전,1939,삼중당) 1976년 2월 7일 KBS 창립기념특집 대담프로 (회고담) 녹화중 졸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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