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일
Lee Byung-iI / 李炳逸 / 1910  ~  1978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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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공작부인 (이병일,이상언, 1964) 총감독
귀국선 (이병일, 1963)
서울로 가는 길 (이병일, 1962)
청춘일기 (이병일, 1959)
자유결혼 (이병일, 1958)
시집가는 날 (이병일, 1956)
반도의 아가씨들 (이병일, 1943)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풍년기 (이병일, 1938)

주요경력

1940년 명보영화사 설립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전속 감독 입사
1945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
1949년 안창호의 아들이자 영화배우인 필립 안의 추천으로 남가주대학(USC) 수학
1954년 동아영화사 설립
1962년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장, 아시아영화제작자연맹 부회장
1974년 필리핀아시아영화제 대회의장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기타정보

기타이름
이병록(李炳祿)
수상내역(영화)
1956년 아세아영화제 최우수 희극상 <시집가는 날)
1959년 제3회 국제영화상 작품상, 아시아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에딘버러 영화제 출품 <자유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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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한자가 다른 이병일(李炳一)이라는 설(식민지시대대중예술인사전, 한국영화감독사전)과 이병록(李炳錄)이란 설이 있다(친일인명사전). 아호는 졸정이다. 도쿄 미사키 영어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황운의 <딱한 사람들>(1932)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와 인연이 닿았다. 일본 유학 중 김소동과 1933년에 코리아레코드사를 설립했으며, 1936년 닛카츠(日活) 영화사 연출부에 입사해 아베 유타카(阿部豊) 밑에서 연출공부를 했다(식민지시대대중예술인사전). 1940년 귀국 후 함흥에서 명보극장을 운영하던 이기웅과 명보영화사를 설립했고, 1941년에 <반도의 봄>을 연출했다. 이후 잇따라 1943년 <반도의 소녀들>, 1944년 <적기는 다시 온다>를 연출했고, 1945년 <고향 이야기>를 촬영을 진행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해방뉴스>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좌익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친일인명사전). 하지만 1947년부터는 우익 영화인 조직인 영화감독구락부에 참여했다(식민지시대대중예술인사전). 1948년 외무처장 한원신의 추천으로 20세기 폭스사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49년 안창호의 아들이자 영화배우인 필립 안의 추천으로 남가주대학(USC)에서 영화공부를 하기도 했다(친일인명사전). 귀국 도중 한국전쟁을 맞아 일본에서 머물다가 1954년 귀국해 동아영화사를 설립하고 <시집가는 날>을 연출하여 흥행을 거두었고, 이 영화로 아세아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최우수 희극상을 수상했다(동아일보a). 이후 연출한 <자유결혼>(1958)으로 대중적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해외 영화제에서 초청받기도 하였다. 잇따라 <청춘일기>(1959), <서울로 가는 길>(1962), <귀국선>(1963), <공작부인>(1964)을 연출했다. 1960-70년대에는 다수의 작품의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8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별세했다(동아일보b).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57년 5월 25일자 4면
동아일보b 1978년 11월 7일자 7면
강옥희 외,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은 발음이 같으나 끝자가 다른 병일(炳一). 아호는 졸정이다. 1910년 6월 2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와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1927)했다. 대학에 진학하여 의학공부를 하라는 부모의 소망과는 달리 그는 외교관이 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유학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무렵 미국에서 돌아와 함흥에 길안든 영화사를 설립하고 <딱한 사람들>의 제작을 추진중이던 황운(黃雲)이 찾아와 미국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헐리우드의 어느 감독이 유망한 청년이 있으면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그 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내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상대역은 <아리랑>에서 악역으로 유명한 주인규란다. 그래서 주역을 맡게되었다. 이것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동기다.”(나의 영화편력 / 이병일: 월간영화·1977. 10~11) 일이 풀리지 않자 미국유학의 꿈을 접고 1932년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에 도착하자 간다(神田)에 있는 미사끼(三山奇) 영어전문학교에 입학. 1935년 학업을 마치자 닛가츠(日活) 촬영소 조감독 채용시험에 뽑혀 들어가게 된다. 이에 앞서 송죽포전(松竹蒲田) 촬영소 조감독 공개모집에 응모했으나 면접 때 배우할 생각이 있으면 받아주겠다는 말을 듣고 포기해야 했다. 그는 여기에서 일본의 아베(阿部豊) 문하에 들어가 입사 제 1회작 <연애와 결혼의 서(書)>를 만들었다. 조선사람으로는 그 혼자였다. 고작 신흥키네마 촬영부의 김학성, 교토 송죽촬영소 연출부의 히나츠 에이타로(한국명 許泳) 정도였다. 그는 이무렵 일본에 유학중이던 김소동의 제의로 코리아 레코드회사 설립에 공동 참여. 박기채 감독의 <춘풍> 주제가를 제작하거나 신인 가수를 배출하는 데에 일하기도 했다.
닛가츠 촬영소에서 7년간 영화수업을 쌓고 귀국한 이병실이 먼저 손댄 것은 명보영화사의 창설이었다. 그 첫 제작 영화로 내놓은 것이 1940년도 ‘슈칸 아사이(週利朝日)’ 대중문예 현상모집 당선작 <반도의 예술가>를 각색한 <반도의 봄>(1941)이었다. 신인 배우를 사랑하는 영화제작자가 자금난에 봉착하여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옥고를 치루었으나 난관을 물리치고 재기한다는 내용. 양세웅 촬영. 김소원, 김일해, 김소영 공연인 이 데뷔작은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안종화는 <반도의 봄>에 대해 “그때가지 구태에 젖어있던 작품들에 비해 월등한 것이었다”(한국영화측면비사/ 1962. 춘추각)고 평가했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의 연출자들은 고작 초보적인 기술과 막연한 지식, 그리고 정열만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병일은 영화라는 하나의 독립된 예술을 누구보다도 더많이 연구, 터득하여 자신있는 태도로 연출의 정확성을 기했다. 여기저기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출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감독으로 성공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다음날 아침부터 일부 영화인들은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군국주의의 계몽영화를 독점적으로 제작하다시피 해온 조선영화사 창고를 부수고 카메라 등 기재를 끄집어 내 ‘해방뉴스’를 찍기 시작했는데 이병일도 여기에 동참했다. 서대문 형무소 앞, 서울역 광장, 종로의 가두행진 등이 좋은 소재거리였다. 같은 정치 사회적인 격동기에 그는 1948년 외무처장의 추천과 20세기 폭스영화사의 초청으로 도미. 다음해 3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배우 필립 안의 추천으로 오래전 부터 바라던 LA 남가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 대학은 미국 유일의 영화예술 아카데미로서 말론 브란도, 헨리 폰다 등이 배출되었다. 1950년 6월 촬영 기재를 구입하고 귀국길에 6·25전쟁을 만나 부득이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서울에 돌아온 그는 동아영화사를 설립하고 그동안 생각해 온 오영진 희곡 <맹진사댁 경사(孟進士宅 慶事)>의 제작을 서둘렀다. 제목이 수출용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여겨 <시집가는 날>로 개명. 영어로 알기 쉽게 로 붙였다. 그의 두 번째 제작, 감독 작품인 <시집가는 날>(1956)은 세도가의 가문과 사돈이 될 것을 기대하고 판사댁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이게 된 맹진사(김승호)가 그 사윗감이 절름발이 라는 헛소문을 듣고 서둘러 몸종(조미령)을 딸대신 시집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중심의 시대 풍자극. 제 4회 아세아 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함으로써 해방 후 처음 해외에서 거둔 성과로 기록된다. 계속하여 혼기에 이른 딸 삼형제가 중매 결혼을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구가하는 홈드라마 <자유결혼>(1958), 방송국 젊은 아나운서와 제약회사 사장 딸의 로맨스를 담은 <청춘일기>(1959), 남편을 만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밀입국한 두 여인이 남편과 어머니를 각각 만났으나 밀입국자라는 이유로 체포돼 송환되는 <귀국선>(1963),사고방식과 취미가 달라 사이가 좋지않는 부부가 자녀들의 역할에 감화돼 화목하는 <공작부인>(1964)등을 연출. 앞의 영화를 포함하여 모두 7편의 감독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밖에 17편의 영화를 기획,제작하였으며 이성구 감독을 배출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밝고 낙관적인 인생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대표작은 <시집가는 날>. '조선영화의 정체성을 찾는 길만이 영화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있다'(전환기 조선영화의 진로/영화시대-1946.4)는 스스로의 다짐처럼 한국적인 가치관과 정서를 지향한 가작이었다. 친구인 김소동이 말했듯이 미모와 멋을 겸비하고 특히 옷을 단정히 입는 외국풍의 신사(나의 이력서/한국일보-1982.2.24~)였던 이병일은 사회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장,아시아영화제작자연맹 부회장(1962),필리핀아시아영화제 대회의장(1974)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 온 공로로 1978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그해 11월 27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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