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모
Han Hyeong-mo / 韓瀅模 / 1917  ~  1999
대표분야
감독, 편집, 촬영
데뷔작품
성벽을 뚫고 1949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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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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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엘리지의 여왕 (한형모, 1967)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
천국과 지옥 (한형모, 1963)
왕자 호동 (한형모, 1962)
언니는 말괄량이 (한형모, 1961)
돼지꿈 (한형모, 1961)
질투 (한형모, 1960)
가난한 애인들 (한형모, 1959)
여사장 (한형모, 1959)
남성 대 여성 (한형모, 1959)

주요경력

제4대 영화감독협회 회장 역임
한형모프로덕션 설립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만주에서 미술학교를 나와 일본예술대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고 일본 동보영화사에서 촬영으로 데뷔하여 <자유만세>등을 촬영했다. 한형모 프로덕션을 창립하고 여순사건을 영화화한 <성벽을 뚫고> 49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67년 은퇴작 <엘레지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30여편의 영화에서 촬영기사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영화작품
태양의 아이들(1944,최인규) 촬영
사랑의 맹서(1945,최인규 촬영)
자유만세(1946,최인규) 촬영
죄없는 죄인(1948,최인규) 촬영
여명(1948,안종호) 촬영
마음의 고향(1949,윤용규) 촬영
여군(1954,조정호) 촬영
불사조의 언덕(1955,전창근) 촬영,편집
단종애사(1956,전창근) 촬영,편집
성벽을 뚫고(1949,한형모)
운명의 손(1954,한형모)
청춘쌍곡선(1956,한형모)
자유부인(1956,한형모)
마인(1957,한형모)
순애보(1957,한형모)
나 혼자만이(1958,한형모)
사랑하는 까닭에(1958,한형모)
남성 대 여성(1959,한형모)
가난한 애인들(1959,한형모)
여사장(1959,한형모)
질투(1960,한형모)
돼지꿈(1961,한형모)
언니는 말괄량이(1961,한형모)
왕자 호동(1962,한형모)
천국과 지옥(1963,한형모)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한형모)
엘레지의 여왕(1967,한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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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만주 신경미술학교(新京美術學校)를 졸업한 후 만주 미쓰고시(三越)백화점에서 간판을 그렸다고 한다. 귀국 후 극단 신태양(新太陽)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했으며,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1941)에 미술팀으로 참여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후 일본 도호(東寶)영화사 촬영부에 입사하여 촬영을 배웠으며, 최인규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과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국제영화, 한국영화감독사전). 해방 후에도 최인규와의 협업을 이어나갔으며 <자유만세>(1946)와 <죄없는 죄인>(1948)을 촬영했다. 감독 데뷔는 김영수가 각본을 쓴 <성벽을 뚫고>(1949)였으며, 전쟁이 나자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영화촬영을 하면서 <정의의 진격>(1951)을 만들었다(한국영상자료원). 전후 상업영화 복귀작은 자신의 이름을 딴 한형모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제작, 감독한 <운명의 손>(1954)이었다. 이를 필두로 <청춘쌍곡선>, <자유부인>(1956), <마인>, <순애보>(1957) 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스릴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겸비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정비석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자유부인>은 개봉년도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논란을 끌어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사랑하는 까닭에>(1958), <여사장>(1959), <질투>(1960), <천국과 지옥>(1963) 등의 작품에서는 연출과 촬영을 겸했으며, <왕자 호동>(1962)은 제작까지 겸한 작품이다. 음악 산업을 담은 두 편의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와 <엘레지의 여왕>(1967) 연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2년 미국 유니버설사의 초청으로 특수영화촬영기술을 연수 받기도 했다(경향신문). 1999년 9월, 82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동아일보).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82년 6월 25일자 2면
동아일보 1999년 9월 23일자 21면
韓國映畵人百人選(一), 『국제영화』 제4권 제10호(1958년 12월 발행).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1950년대의 한국영화』, 이채, 2004, 83-97쪽.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17년 4월 29일(양력)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 석하리에서 공무원이었던 한기제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 백마보통학교와 고등과 졸업 후 만주 신경미술학교를 나왔다. 만주미쓰고시백화점에서 윈도우 간판을 그리다가 귀국하여 신태양 극단에 들어가 2년 동안 무대장치를 담당하고 선전광고, 프로그램을 도안했다. 어떤 때는 극장 간판도 그렸다. 쌀 한 말에 9원 정도할 때 50원 내지 1백원을 수고료로 받았다. <집 없는 천사>(1941)의 미술파트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최인규 감독의 추천에 따라 일본의 동보영화사에 입사, 촬영 기술을 익히고 돌아왔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나서 영화를 통한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이에 따라 내선일체, 지원병 제도 등을 장려하기 위한 친일 어용영화들이 양산되었다. 그에게 일거리가 몰렸다. 스물한 살 때 찍은 <망루의 결사대>(1943)를 시발점으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의 맹세>(1945)등이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그의 안정된 촬영술은 해방 이후의 작품에서 더욱 돋보였다. 어느 새 컴비가 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비롯하여 <마음의 고향>(1947,윤용규), <성벽을 뚫고>(1949,한형모)등 광복 영화기의 가작으로 꼽히는 일련의 작품에서 그 기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미술과 촬영을 통해 축적된 그의 영화적 역량은 1949년 <성벽을 뚫고>의 감독을 맡으면서 구심점을 찾게 된다. 이 영화는 분단이 갈라놓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처남과 매부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다. 대학의 동기 동창이자 처남 매부 사이인 이집길과 권영팔은 각기 공산주의자와 육군 소위로 사상을 달리했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는 대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여 공산주의자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다. 이런 가운데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서로 적이 되어 맞서게 된다. 먼저 매부가 처남의 가슴에 총을 겨눈다. 처남도 하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홍개명 감독의 <전우>와 함께 초기의 반공영화로 분류되는 특유의 장르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성벽을 뚫고>는 수동식 촬영이 일반화 되다시피 했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계식 촬영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후속작이 4년이나 늦어진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다. 손님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간첩단 두목에게 제공하던 카바레 마담이 방첩장교를 도와 간첩단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제 2작 <운명의 손>을 윤인자,이향 주연으로 발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54년이었다. 이 영화는 키스신을 처음 시도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전창근 감독 <불사조의 언덕>(1955)의 촬영으로 한 해를 보낸 뒤 1956년 <청춘쌍곡선>을 신호로 그는 <자유부인>(1956), <마인>, <순애보>(1957), <나 혼자만이>, <사랑하는 까닭에>(1958), <남성 대 여성>, <가난한 애인들>, <여사장>(1959), <질투>(1960), <돼지꿈>, <언니는 말괄량이>(1961), <왕자 호동>(1962), <천국과 지옥>(1963),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 <엘레지의 여왕>(1967) 등 꾸준히 감독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이 가운데서 대중적인 성취도가 높았던 화제작은 가난하고 부유한 두 가정의 모습을 남녀의 사랑을 매개로 풍자한 코미디 <청춘쌍곡선>과 <자유부인>이었다. 특히 <자유부인>은 해방 후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겪게 되는 자유풍조의 부작용을 대학교수(박암) 부인인 오마담(김정림)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향락적 자유풍조를 대변하는 춤바람은 여권의 신장을 암시하는 치맛바람, 물욕에 대비되는 곗모임과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외제를 선호하는 ‘최고급품’ 구매붐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실제로 이 무렵 부산, 대구 등지에서 가정주부들의 춤바람이 성행,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성문란을 야기시킨 세칭 박인수 사건은 사회적인 경종이 되었다. 서울신문에 연재돼 논란을 빚은 정비석 원작으로 이 영화를 통해 김정림, 양미희를 유망주 배우로 배출하였다. 이 영화의 여세는 <속 자유부인>(1957)을 비롯. 1969년, 1981년, 1986년, 1990년 등 모두 다섯 차례나 리메이크 될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말년까지 촬영기에 애착을 갖고 소중히 다뤘던 한형모는 일생동안 <성벽을 뚫고>에서 1967년 가수 이미자의 반생을 다룬 <엘레지의 여왕>까지 18편의 감독작과 <천국과 지옥>(1963)을 마지막으로 촬영작 15편을 남기고 1999년 별세했다. 그는 시대상황을 대중적 친화력으로 표출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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