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수
Park Kwang-su / 朴光洙 / 1955  ~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데뷔작품
칠수와 만수 1988
활동년대
1980, 1990, 2000, 20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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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눈부신 날에 (박광수, 2007)
여섯개의 시선 (임순례,정재은,여균동,박진표,박광수,박찬욱, 2003)
아닌 밤중에... (박광수, 2001)
디지털 삼인삼색 2000 (김윤태,장위엔,박광수, 2000)
빤스 벗고 덤벼라 (박광수, 2000)
이재수의 난 (박광수, 1998)
전태일의 비밀 (박광수, 1996)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박광수, 1995)
그 섬에 가고싶다 (박광수, 1993)
베를린 리포트 (박광수, 1991)

주요경력

1979년 실험극단 활동
198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 영화써클 '얄라셩' 활동을 통해 단편 작업
1982년 연우무대 활동 시작. '서울영화집단' 창립 후 활동
1985년 프랑스 영화학교 E.S.E.C 졸업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조감독
1988년 <칠수와 만수>로 감독 데뷔
1996년 뉴욕 국제인권영화제에서 '박광수 회고전' 개최 (뉴욕 링컨센터). 미국 New York Times, Village Voice, 프랑스 Connaissance du Cinema 등 해외 주요 언론에 보도
1996년 제16회 하와이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역임
1996~98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1997년 제10회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역임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2006~07년 아시안필름마켓 운영위원장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한국영화감독 이사
여수 세계엑스포 예술총감독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서울대 미술대학 4학년 때 실험성 짙은 작품을 추구하였다가 서울대 영화써클인 '얄라셩'에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몇 편의 8㎜ 단편영화를 제작,감독하였다. 이 중에서 <섬>과<그들도 우리처럼>의 단편이 영화진흥공사의 '청소년영화제'에서 특별상,촬영상등을 받았다. 졸업 후 '얄라셩'출신들과 '서울영화집단'을 결성하여 집단창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84년 프랑스의 영화교육 학교인 파리의 E.S.E.C에 2년 과정에 편입,이듬해 졸업할때까지 2년 동안, 이슈가 되는 주요 작품들과 횡적으로 80여개국의 영화들을 1000편정도 감상하면서 하는 영화의 형태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을 보았고, 학교교육을 통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는 작업과정을 익혔다. 귀국 후 이장호 감독의 <이장호이 외인구단>(86)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87)의 조감독을 하였다. 자신이 배우이기도 했던 극단 '연우무대'의 공연작품인 연극<칠수와 만수>를 1988년 영화로 각색, 감독하여 국내외의 1989년 대종상 영화제 '신인감독상'등과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젊은 평론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하였다.
주요 영화작품
칠수와 만수(1988,박광수)
그들도 우리처럼(1990,박광수)
베를린 리포트(1991,박광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박광수)
이재수의 난(1999,박광수)
디지털 삼인삼색 2000(김윤태,장위엔,박광수)
애착작품 및 사유
외국 감독들 중에 좋게 평가하고 있는 감독으로는 세네갈의 셈벤 우스만간 감독, 독일의 에어 조크 감독, 필리핀의 리노 브로카 감독들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나라의 독특한 것, 전해내려오는 민담들을 영화화한다.
영화속 명소
<이재수의난>:제주도 동쪽 지방은 개발이 덜 되어있어 비교적 자연림이 많아 제주의 풍광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들도 우리처럼>,<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강원도 태백과 고한는 80년대 후반 폐광되어 광산업의 성장이 멈춘 도시들로 특이한 모습을 갖고 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시각,공간,사운드들에 대한 종합적 탐미적인 작업을 추구하며,외국에서는 '스타일리스트'로 인식되고 있다.국내에서 사회비판적인 리얼리즘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상업성 내에서만 움직이는 상업영화들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영화작업에 들어가기전 보통 1년 정도의 자료와 현장조사를 하고나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다. 촬영들어가기 전 스크랩을 갖고 촬영감독과 얘기할 때도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칠수와 만수>의 고층작업을 찍기 전에 고층장면에 관한 외국의 필름들을 검토해 보고, 당시 칠수와만수의 나이에 해당되는 20대와30대에 대한 인문학적 책들을 통해 사회과학적 현상들도 점검해 본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사실감 있는 파악을 위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직접 인터뷰도 하면서, 촬영이 서울 현장에서 가능한지의 여부 등도 검토한다. 카메라 뷰파인더로 동선체크하는 것과 풍경에서의 근경, 중경, 원경의 분배등 모두 촬영전에 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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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55년 1월22일 강원도 속초 출생. 부산으로 이사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나왔다. 1990년도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연 기수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82년 대학 영화동아리 얄랴성 출신들을 규합하여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어 비판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영화제작 및 이론을 지향해왔다. 그후 그는 프랑스의 영화교육특수학교(E.S.E.C)에서 체계적인 영화연출 수업을 쌓는다. 1985년 귀국한 감독은 이장호 감독 밑에서 연출부 생활을 하다가 1988년 <칠수와 만수>라는 영화로 데뷔한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연극을 각색한 이 작품의 성공으로 감독은 새로운 한국영화의 물결이 도래했음을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그의 대표작이 될 <그들도 우리처럼>을 만들어 ‘의식 있는 청년 감독’이라는 명성을 얻게된다. 특히 그가 1990년대 초에 만든 이 작품은 당시 한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분단의식과 이로 인해 악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노동문제) 등을 집약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여 운동권 수배자 한태훈(문성근), 자본가의 아들(박중훈) 그리고 다방레지 송영숙(심혜진)의 표면상 삼각관계를 축으로 전개되는 단절과 불화의 이야기다. 즉 이 영화는 그러한 관계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그물망을 통해서 우리 현실의 근본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치열한 문제의식은 이를 영화적 언어로 형상화해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감독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각이 돋보이는 문제작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데뷔작인 <칠수와 만수>에서도 이미 감지되고 있다. 이 영화도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서 제대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두 젊은이의 고뇌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칠수(안성기)는 좌익활동을 했던 아버지 탓에 연좌제에 묶여 퇴출당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만수(박중훈)는 양공주 출신 어머니 탓에 삐딱한 인생을 살아가다 결국 사회적 편견의 희생양이 된다는 얘기다. 이 작품으로 그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청년비평가상’을 받았다. 그는 세 번째 작품인 <베를린 리포트>(1991년)에서 앞의 두 작품에서 나타난 주제의식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가 분단이라는 지극히 민감한 현실적 주제를 들고 나왔을 때 평단의 반응은 우려반 기대반이었다. 시대적 분위기상 반공영화의 아류로 전락할 여지도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통독 이전에 동독에 입양되었던 두 남매의 기구한 인생을 남한의 민완기자 성민(안성기)이 취재 보도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부르주아 가문에 입양된 동생 영희(강수연)는 양부의 성적노리개로 전락하고, 북측에 포섭된 오빠 영철(문성근)은 골수 혁명분자로 탈바꿈한다. 결국 국적 없이 떠돈 두 남매의 비극적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은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인 해외입양이라는 표면적 소재와 분단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아우르려는 야심을 가졌지만,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물 설정이 너무 도식적인 데다가, 사건 전개의 보편성도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현실이라는 중압감이 너무 컸던 탓이리라. 그러나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한번 분단의 장벽에 도전한다. 그는 1993년 임철우의 동명원작을 바탕으로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를 만든다. 분단문제는 우리민족(남북한)이 겪고 있는 우리만의 특수성이므로 전작에서처럼 동독을 매개로 한 해결방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영화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바다에 꽃상여가 떠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6.25 사변이 한창일 때 그 섬에 살다 떠났던 문덕배(문성근)가 망자가 되어 고향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한사코 꽃상여의 섬 진입을 가로막는다. 좌우대립의 극한적 상황 속에서 상당수의 마을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들 재구는 아버지의 업보 탓에 장사마저 제대로 치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분단의 업보는 대대손손 이어질 것임을 이 영화는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섯 번째 작품으로 한국 노동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인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을 만들어 또다시 평단을 들끓게 했다. 전태일의 실존적 행적을 다룬 흑백영상과 그를 추억하는 한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컬러영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영화는 일반관객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그해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 및 감독상을 수상했고, 1996년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채 직-간접적으로 분단의식을 집요하게 추구해오던 그는 세기말인 1999년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영화를 들고 나온다. 이 영화는 구한말 당시 천주교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관군과 이에 맞서 항쟁을 벌였던 제주도 민중간의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주제의식의 일탈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단의 뿌리부터 새롭게 정립하고 싶은 그의 또 다른 야망의 표현이었다. 제작 당시 3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자본을 들여 만든 대형 프로젝트였으나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크게 어필하지는 못했다. 대규모 자본을 들인 사적영화(예술영화)라는 비판도 받았다. 이후 그는 디지털 영화 등의 실험적 제작방식에 몰두했는데, 그 결실이 여섯 명의 감독이 한 에페소드씩을 맡은 <여섯 개의 시선>(2003년)이라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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