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한
Jang In-han / 張仁漢 / 1918  ~  2007
본명
장인환 (Jang In-hwan)
대표분야
배우, 분장
데뷔작품
3.1운동 1962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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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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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소화성 장의사 (, )
아라한 장풍대작전 (류승완, 2004) 환자할아버지
내 머리속의 지우개 (이재한, 2004) 사수
불어라 봄바람 (장항준, 2003) 선국부
유아독존 (홍종오, 2002) 은지 할아버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장선우, 2002) 돈많은 늙은이
가위 (안병기, 2000) 노인
하면 된다 (박대영, 2000) 정씨종친회 사무장
북경반점 (김의석, 1999) 칼가는 노인
인정사정 볼것 없다 (이명세, 1999)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19살의 나이로 극단 인간좌에 입단하여 현재에 이르기 까지 오직 한길을 걸어온 우리 나라 몇 안돼는 원로 배우이다.연극으로 25년간 그리고 우리 나라 전쟁 후에 영화 배우 생활하며, 영화 메이컵 겸업. 연기하고 있다가 TV드라마, MBC이조 500년사, KBS 우리는 중산층,SBS관촌수필로 TV쪽으로도 데뷔하였다.
주요 영화작품
3.2운동(1962)
청년 이승만(1959,신상옥)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정창화)
연산군(1961,신상옥)
사랑의 동명왕(1962,최훈)
대심청전(1962,이형표)
춘향전(1961,홍성기)
단종애사(1963,이규웅)
여장부(1964,조긍하)
대원군(1968,신상옥)
용호 풍운(1970,사병록)
장마(1979,유현목)
사람의 아들(1980,유현목)
달대취권(1981,강범구)
애권(1982,이형표)
저녁에 우는 새(1982,김수용)
삐에로와 국화(1982,김수용)
관속의 드라큐라(1982,이형표)
(신)애권(1982,이형표)
원한의 공동묘지(1983,김인수)
불새의 늪(1983,고응호)
화녀촌(1985,김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정지영)
주요기타작품
■ 주요작품(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5)
며누리죽엄(1938)
바람부는 시절(1939)
광산에 피는 꽃
홍경래전


■ 주요작품(TV)
1983~1990년 조선왕조 오백년 (MBC)
1991년 우리는 중산층 (KBS)

1992년 관촌수필 (SBS), 사랑이 뭐길래
1993년 제3공화국 (MBC)
1993년 명태 (MBC)
1995년 제4공화국 (MBC), 찬란한 여명
1996년 용의 눈물 (KBS)
2002~2003년 대망(SBS) 등 다수
애착작품 및 사유
잠깐 잠깐 나가는 단역의 연기자가 무슨 애착이 있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굴곡 있는 인생의 여정을 표현이다. 겸손함이 배어나 오고 인생의 선배로서의 인상을 주고 싶다. 자화상이라고 할까? 지금은 또 할아버지 역할의 나이니까 살아가는 역경과,애정,비애가 묘사되는 가족적인 역할의 할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다 말한다.이조사극 찬란한 여명에서 머리를 깎고 조연에 못잖은 역할해 본 것과,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생이빨 4개를 뽑아서까지 연기에 매진해 보겠다던 스님의 역할이 아직도 흔적으로 남고 있다.
하고싶은 말
너무 어려움이 많았던 생활이다.활동은 노후대책이 되는데 경제적이 노후대책이 안서는게 큰 문제이다.젊은 사람의 머리 속에 예절이 깃들여야 한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삶이 진솔하게 묻어 나오는 가정의 모습, 살아가는 역경과, 애정, 비애가 묘사되는 가정에서 할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싶다.
자기소개 및 취미
30여년간 사이클을 지금도 타고 있다. 그 당시에 타던 자전가 현재의 자전거이다. 또한 낚시도 30~40년간 해왔다.젊은 층하고 항상 대화하고 싶다.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장인한이 19세가 되었을 때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당시 징집대상에서 제외되던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하고, 극단 ‘인간좌’에 입단한다(한국영상자료원, 필름2.0). 그는 집문서를 담보로 자금을 마련해 극단에 운영비를 제공했고 이 때문에 주연배우를 맡을 수 있었다. 연극배우 시절에는 조선팔도와 만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누비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을 북한에서 맞이한 그는 「홍경래전」 등의 연극을 하면서 북한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4후퇴 때 극단 단원들과 함께 월남했다. 전라북도 군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극단 ‘황금좌’의 성광현 단장의 권유로 후배 배우들과 함께 ‘황금좌’에 합류했다. 이후 극단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연극을 했다. 1960년대 초반 연극극장들이 영화관으로 바뀌면서 설 무대를 잃게 되자 영화배우로 전향했다.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으나, 단역배우로는 생계가 어려워 생활비를 벌기위해 배우를 겸하면서 분장을 시작했고, 분장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배우 수입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또한 분장을 맡은 영화에 단역배우로도 출연하기도 했다(필름2.0).
드라마 연출가 김종학 PD의 소개로 「조선왕조 오백년」(MBC)에 출연하면서 TV탤런트 생활을 시작해, 「우리는 중산층」(KBS), 「대망」(SBS) 등에 출연했다. <인정사정 볼것 없다>(1999),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등에 출연하면서 원로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2007년 별세했다. <이끼>(2010)의 분장감독이었던 장진이 그의 아들이다(동아닷컴).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91년 1월 28일자 20면.
경향신문 1991년 1월 28일자 13면.
“파란만장 노익장 장인한”, 《Film 2.0》, 2004년 11월 18일자.
(http://yaaah.blog.me/20007689768에서 재인용)
“이끼 정재영 특수분장 비용 얼마나 들었을까?”, 동아닷컴, 2010/07/30.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201007300035285)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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