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관
Choe Sung-kwan / 崔聖寬 / 1925  ~  1999
대표분야
배우, 감독
데뷔작품
똘똘이의 모험 1946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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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태양을 등진 사람들 (최성관, 1961)
남의 속도 모르고 (최성관, 1959)
선화공주 (최성관, 1957)

주요경력

1939년 극단 성군(星群) 단원
1946년 극단 해방극장(解放劇場) 단원
1949년 극단 팔월극장(八月劇場) 단원
1952년 극협(劇藝術協會) 단원
1955년 신협(新劇協議會) 단원
1962년 국립극단 전속단원
1968년 극단 자유전선(自由戰線) 단원 등

기타정보

기타이름
최성섭
영화계 입문배경
1994년에 저는 극단 <상군>에 입단하여 연극에 발을 디디고 해방 후 극단 <해방극장>이라는 좌익계통의 연극을 하던 중 관객이셨던 '이규환'감독을 발견!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평소 자기의 관심과 달랐던 이 극단을 나와(당시 있었던 많은 연극인이 이후에 월북함) 마침 촬영 중이던 "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주요 영화작품
똘똘이의 모험(1946,이규환)
민족의 새벽(1947,이규환)
논개(1956,조감독겸)
남의 속도 모르고91959,최성관)
태양을 등진 사람들(1962,최성관)
천년호(1969,신상옥)
피막(1980,이두용)
뽕(1985,이두용)
겨울나그네(1986,곽지균)
상처(1989,곽지균)
짧은 여행의 끝(1992,유건조)
주요기타작품
■ 연극
<녹쓰는 파편>(유치진)
애착작품 및 사유
6.25로 부산피난 때 "녹쓰는 파편"이란 소설을 유치진 선생이 연출하여 빨갱이 역할을 했는데, 산 속에서 누더기를 입은 곱추가 여자(문영숙)에게 꽃을 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스스로 연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아마도 자신의 숨은 끼를 백분 발휘하여 연기를 해 아직도 잊지 않는 것 같다. 또, 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연극도 참여를 하였는데 극단 '팔월극장'에서 "상록수"라는 작품은 당시 최고였다고 강조.(비록 저는 건배역할이었지만) 더욱 기억에 남은 이유는 옆 다방에서 김구선생이 사살되었다는 사실.
하고싶은 말
"일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 연극을 다 해봐서 별 후회는 없다.", "개성이 강해야 눈에 띈다. 하지만, 나는 개성이 강하지 못하다.(외적인 면) 얼굴의 뉘앙스가...개성이 없는 점을 결국 넘지 못하고 연기를 멈춰서 안타깝다." 배우, 감독, 시나리오 등 많은 관심과 재능을 보였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어설픈(?) 능력으로 어느 한 곳에도 빛을 못 본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어디를 가든 역시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제가 주로 했던 역할은 교수, 신부, 의사등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스타일이지만 역으로 지적이고 냉철하게 보이는... 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역은 아닌 것 같다. 지금껏 이런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사실과 다르게 오버하는 역할을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자기소개 및 취미
연극배우로서 출발하여 영화배우로 준비도 되지 않는 상태에 조감독을 시작하여 "선화공주"때는 16mm 천연색으로 찍어 미국가서 확대하여 국도극장에서 5만명이 관람하였지만, 미비한 기술로 만족스럽지 못함. 그러면서 저는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갖고 쓰기도 했었다. 수동적인 성격으로 역할이 주어지면 하고 작품이 들어오면 시작하는 저의 성격으로 활발하게 자신의 끼를 보여주지 못하고 국립극단에서 연극에 다시 활동한다. 그 후 "남의 속도 모르고"를 감독하고, 제작자와 마찰을 일으켜 다시 연극무대로 또 신파극 "태양을 등진 사람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20대 후반부터 30대말까지 감독생활을 하다가 가정, 주변상황들이 문제를 일으켜 더 이상 감독을 하지 않고 배우로서의 길을 다시 걷게 된다. 그 사이에도 국립극단 <신협>에서 연극무대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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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대학교를 중퇴했으며, 최성섭(崔聖燮)이라는 예명으로 연극배우 생활을 했다(김기제
). 1939년 설립된 극단 성군(星群)으로 연극계에 몸을 담았으며, 해방 후 극단 해방극장(解放劇場) 등에서 활동했다(한국영상자료원). 1946년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으로 영화배우로도 데뷔했으며, 이듬해 같은 감독의 <민족의 새벽>에도 출연했다. 1949년 극단 팔월극장(八月劇場)에 입단했으며, 전쟁 발발 후에는 손전 감독의 <공포의 밤>(1952)에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극협(劇藝術協會)에 입단하였으며 1955년 신협(新劇協議會)을 거치며 국립극단의 전속배우로 활동했다(김기제). 1957년 그는 영화 <선화공주>를 통해 감독으로 변신했다. 최성관이라는 본명으로 연출한 이 작품에서 그는 편집도 겸했고, 다음 작품 <남의 속도 모르고>(1959)에서도 감독과 편집을 함께 맡았다. 마지막 감독작 <태양을 등진 사람들>(1962) 이후 한동안 영화 활동이 뜸했으나, 1967년 장일호 감독의 <일지매 삼검객>(1967)으로 다시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1999년에 별세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김기제 편,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252쪽.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25년 9월 5일생. 서울 출생.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선화 공주善花公主>를 감독하였다. 감독활동은 1959년<남의 속도 모르고>, 1962년 <태양(太陽)을 등진 사람들>로 이어졌다. 김근자.박귀희 주연의 <선화공주>는 흑백영화로 일관되다시피한 당시에 16미리이기는 했으나 모처럼 천연색 필름으로 촬영하여 큰 관심을 끌었다. 이는 홍성기 감독이 <여성의 일기>(1949)로 색채 화면을 선보인 이후 두 번째의 시도였다. 그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99년 7월 19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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