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
Son Jun / 孫傳
출생·사망
1910 ~ 1999
대표분야
배우, 감독
데뷔작품
무지개 1935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필모그래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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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
공포의 밤 (손일포, 1952)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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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정보

기타이름
손일포, 한일호, 孫一圃
영화계 입문배경
학교 다닐 무렵부터 시네마광이라 불릴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었다. 당시 일본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멀쩡한 인재가 영화배우를 하고 싶다고 하니 집에서는 남사당패나 하는 짓을 하려고 한다며 뒤집어졌고 반대를 많이 하셨었다. 그렇지만 배우의 꿈은 시들지 않았고 노력 끝에 한 고향 분이었던 이규환 감독님의 <무지개>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해방 전까지 많은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했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까다로웠다.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3년간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1500편에 달하는 무수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런데도 내가 스타가 되지 못한 이유는 예명을 하도 많이 바꾸어서인 것 같다. 손전, 손일포, 한일호 이렇게 예명을 썼으니 스타가 됐겠나.
주요 영화작품
무지개(1936,이규환감독)
수정해협
조선해협(1943,박기채감독)
젊은 모습(1943,풍전사랑감독-일본)
똘똘이 모험(1946,이규환감독)
민족의 새벽(1947,이규환감독)
조국의 어머니(1949,윤대룡감독)
돌아온 어머니(1949,이규환감독)
화랑도(1950,강춘감독)
내가 넘어온 38선(1951,손전감독)
공포의 밤(1952,손전감독)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손일포감독)
여자의 열쇠(1963,손전감독)
리바번
오인촌
회전목마(유현목감독)
개벽(1991,임권태감독)
태백산맥(1994,임권택감독)
축제(1996,임권택감독)등
주요기타작품
■ 주요작품(TV)
인간시장
거인
해뜨는 언덕
징검다리
애착작품 및 사유
유현목 감독의 <회전목마>란 작품이 있었다. 거기서 광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 박성관 조감독이 이 역할은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책을 주는데 그런 말까지 듣고 만약에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해내면 망신살이 뻗쳤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배우생활을 그만두겠다는 각오를 하고 촬영기간 3주간 두문불출하고 역할을 연구했다.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 까다로운 감독님이 한번도 지적하지 않은 채 그대로 통과했다. 그런데 녹음실에서 원판이 분실되는 바람에 개봉을 못했다. 그 다음 임권택 감독의 <개벽>. 선승 역할이었는데 임감독이 많이 걱정을 했다고 한다. 성격에 맞을 것 같아 불렀는데 자기 의도대로 역할이 소화될까.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는데 나는 미리 시나리오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가지고 갔다. 남들은 다 잘 때 그 녹음기를 틀어놓고 대사를 외우며 밤을 샜다. 슛 들어가는데 감독 의도대로 아주 흡족한 연기가 나왔다고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립박수 한번 쳐드리자'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임권택 감독은 나중에 연하장을 띄워서 훌륭하게 연기해 주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기억이 감격스럽게 남는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작품은 아니고, 6.25전쟁이 무대인 <오인촌>이란 영화다. 테렌스 영 감독에 주연배우가 로렌스 올리비에와 세트 미넬리였는데 거기서 다섯 손주를 데리고 피난가는 할아버지로 피난길에 만난 장교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역할이었다. 당시 이성구 감독이 중간에서 한국배우를 소개하면 미국측 연출부에서 오디션을 하고 자기네 보기에 적합하다고 논의된 배우들만 통과과정이 아주 엄격했다. 통역을 통해 연기지도를 받고, 그런 속에서 연기를 마치자 이렇게 훌륭한 연기는 처음이라며 테렌스 영 감독이 감독의자까지 내놓고 등을 두드리며 흡족해 하는 거다. 정말 뿌듯했다.
하고싶은 말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어떤 대가가 말하기를 '배우의 몸에는 보석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 보석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꾸준히 계발해야 된다. 일생동안 연기를 하려면 출세를 서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영화속 명소
자주 갔던 장소로는 동해안 바닷가와, 해방 전에 출연했던 <조선해협>이란 작품의 무대였던 이북의 송전 해수욕장이 기억에 남는다. 유달리 보드러운 모래가 백사장 가득 펼쳐진 전경은 잊을 수 없다. 해금강 역시 기억에 남는 장소.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목사, 스님의 종교지도자나 의사 시골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부드러운 역할을 주로 맡았다. 하지만 사실은 거의 안 해 본 역할이 없다. 맘에 들었던 캐릭터는 평소에는 부드럽지만 흥분하면 무서운 사자처럼 돌변하는 인물들.연기한지 꽤 오래 됐지만 연기를 하는 동안은 중학생 같은 마음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기 생활을 계속 하고 싶은 바램이다. 지금도 TV,라디오의 드라마를 보거나 들을 때 대사를 같이 따라 하면서 연기한다. 현재의 연기 감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내나이 정도 돼서 계속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많지 않을 거다. 지금도 젊은 친구들이 제작하는 단편영화에 출연하고 있으니까. 2년 전부터 <영화연기 인생-65년의 세월(가제)>이란 제목으로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자기소개 및 취미
내 취미는 독서다 예나 지금이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바이올린도 조금 켠다. 교회권사로 활동할 때 찬송가를 즐겁게 부르기 위해 배웠다. 지금은 자서전 집필과 연기 활동 바빠서 거의 손에서 놓은 상태다.
수상내역(영화)
한길상(1987)/백상예술대상(1989)/대종상(1993)/청룡상(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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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손전이 연기자로 데뷔한 것은 1936년 영남영화제작소의 제1회 작품으로 이규환이 감독한 <무지개>를 통해서였다. 이어서 두 번째 작품으로 신경균 감독의 <순정해협>(1937)과 <젊은 모습>, <조선 해협>(1943) 등 일제의 전쟁동원용 계몽영화에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조선일보). 이 시기 손전은 손일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두 작품을 제외하면 식민지 시기 더 이상의 출연작은 확인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동아일보b; 경향신문a). 그리고 손전은 한국전쟁 중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그의 데뷔작은 <내가 넘은 38선>(1951)으로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하한 지주의 아들과 그 지주를 반동으로 몰았지만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청년이 재회한 후, 함께 국군에 귀순하여 북진대열에 참여하여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영화감독사전). 두 번째 작품인 <공포의 밤>(1952)은 시대극으로 “사건처리에 있어서 능숙한 수법”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경향신문b). 이외에도 김내성의 소년소녀 소설을 영화화한 <쌍무지개 뜨는 언덕>(1957)을 비롯하여, <여자의 열쇠>(1963),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을 감독하였다(경향신문c; 경향신문d; 경향신문e; 경향신문f). 감독으로는 15년 남짓 활동을 했지만, 나머지 기간은 <한>, <일월>, <서울무지개> 등 여전히 배우로서 수많은 영화에 참여했다. 자신이 감독한 영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화에서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6년 4월 21일 3면.
동아일보b 1946년 9월 10일 2면.
조선일보 1937년 4월 14일 석간 4면.
경향신문a 1947년 4월 16일 2면.
경향신문b 1952년 8월 13일 2면.
경향신문c 1956년 9월 21일 4면.
경향신문d 1957년 9월 13일 4면.
경향신문e 1963년 12월 24일 8면.
경향신문f 1965년 1월 15일 2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 2011년도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손병철, 예명으로 손일포, 한일호 등이 있다(한국영화감독사전, 한국영상자료원). 대구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1930년 일본 니혼대학 경제과에 유학했으나 중퇴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귀국한 후 이규환 감독의 1936년작 <무지개>에 출연했으며, 신경균의 <순정해협>(1937)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동아일보, 한국영화감독사전). 해방 후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윤대룡의 <조국의 어머니>(1949) 등에 출연했으며, 전쟁 기간 중에는 <내가 넘은 삼팔선>(1951)을 기획하여 각본과 감독, 제작, 출연을 도맡았다. 감독 데뷔작품인 이 영화 이후로 <공포의 밤>(1952), <쌍무지개 뜨는 언덕>(1957), <여자의 열쇠>(1963)를 감독했으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은 김래성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1965년에 손전 본인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마지막 감독작이었으며, 배우로서 활동은 1990년대 말까지 꾸준히 이어갔다. 1999년 9월 별세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6년 4월 21일자 3면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손병철. 191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 1925년 대구공립농업학교 5년 졸업. 1930년 일본대학 경제과 2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31년 경북 청도군 농회기수로 3년동안 근무했다. 26세가 되던 해 이규환 감독의 <무지개>(1936)로 데뷔. 배역은 조연이었으나 혼신의 힘을 다해 좋은 평을 받아 두 번째 작품인 <순정해협>(신경균,1937)에서는 주연으로 올라섰다. 1951년부터 15년 간 제작, 감독을 하면서 돈을 벌고 손해도 보는 굴곡의 삶을 영위한다. 데뷔작인 <내가 넘은 38선>(1951,손전,송태호 주연)은 제작 각본 감독 및 주연까지 겸했다. 이 영화는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월남하다가 38선에서 가족을 희생시키고 단신 남하하여 국군에 입대한 지주의 아들(송태호)이 지주의 일가를 반동으로 모는데 앞장 섰던 청년(손전)을 만나지만 공산당의 기만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국군에 귀순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자 그와 더불어 북진대열에 참여하여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내용. 그는 이 작품의 흥행 성공으로 영화계에 새롭게 인식된 데에 자신을 얻고 <공포의 밤>(1952),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 <여자의 열쇠>(1963)등의 작품을 제작, 감독했다. 영화 외길 반 세기 이상을 걸어오면서 1천 5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 여든 살을 넘기면서도 <사방지>(1988),<서울무지개>(1989)등 단역을 마다하지 않고 배역을 소화하였다. 그는 평소에 이런 말을 즐겨했다. "눈물 젖은 빵을 밤을 지새며 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명배우가 아니다" 그는 1987년 한길상을 비롯하여 백상예술대상 특별상(1989),대종상 특별 연기상(1993ㅡ개벽:임권택 감독),1994년 청룡영화상 특별공로상((1989) 상금 1천만원)등을 수상했다. 1999년 9월 8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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