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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제작기

글:이동은(영화감독) / 201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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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제작기

<환절기>는 명필름영화학교 극영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앞으로 함께 제작할 동기이자 주요 스태프(촬영, 미술, 편집, 사운드, 연기 부문)와 2015년 한 해 동안 프리프로덕션의 사전 단계를 느슨하게 거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 준비를 시작해 5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 약 7주 동안 총 28회차로 촬영을 마쳤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관객에게 처음 선보인 후 연말까지 이어진 개봉 버전의 후반 작업 기간까지 친다면 저예산 학교 졸업영화치고는 꽤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한 셈이다.

프로덕션 약 1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제작일지를 기록했다. 장편 영화연출은 처음이라 다음 작품 제작 시 참고할만한 정보를 남기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제작일지에는 세부 진행 사항과 고민, 그리고 그 해결 과정 등을 후에 복기할 만한 로그북 형태의 파일로 남겼는데, 한창 촬영 중이었던 6월 말 이후로는 기록하지 못했다. 촬영 막바지에 이르자 일지를 쓸 만큼 여유가 없었고, 이후 곧바로 후반 작업에 몰두하느라 미처 끝맺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제작기로 <환절기> 일지를 마무리 짓는 기분이다.

<환절기> 시나리오로 운 좋게도 명필름영화학교에 들어온 후, 다시 테이블 위에 시나리오를 놓고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논의를 했다. 실로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결국엔 처음 시나리오의 의도를 그대로 살리면서, 작품 특유의 결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2015년 8월, 일찌감치 최종고를 확정하고 이후에는 진행 상황에 맞추어 일부 장소나 인물, 대사 등 디테일 수정을 했다.

영화 제작 전 동명의 그래픽노블(만화) 작업과 출간을 통해 독자와 만나며 느낀 바지만, 시나리오는 꽤 호오가 갈리는 편이었다. 일부에서는 소재에 대한 우려 섞인 이야기나 작품의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회의적인 반응도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고유의 색깔과 작은 미덕을 잃지 않고 제작으로 이어갈 수 있었던 동력은 함께 준비하는 이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외로운 마음으로 썼던 시나리오라 그런지, 그들의 지지와 응원은 연출자로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촬영과 미술감독은 학교의 다른 1기 극영화 제작에도 참여해야 했다. 일정이 <환절기>보다 불과 몇 달 앞에 있었기에 아무래도 프리프로덕션에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촬영과 미술 부문은 조금 일찍 서둘러서 사전 작업에 착수했다. 촬영감독과는 본격적인 콘티작업에 앞서 러프하게 각 씬에 대해서 촬영 콘셉트와 기조를 정했다. 콘티작업의 기본 뼈대를 구성했던 셈인데, 덕분에 이후 빠듯한 프리프로덕션 일정에서 콘티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큰솔 촬영감독은 우리가 만들 영화를 퀼트에 빗댄 적이 있다. 작고 섬세한 감정, 그것들이 엮이고 쌓여서 주는 먹먹함을 전달했으면 했다. 촬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백이었다. 일반적인 앵글에서는 다소 벗어나더라도 가급적 빈 여백을 보여주고자 했다. 프레임 속 인물 곁에 있는 공간을 통해서 정서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우리 영화 속에는 인물이 다른 인물들과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이 유독 많다. 카메라 역시 연기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고통받고 상처받는 다른 인물을 직접적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닌 조금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인물의 외로움을 얼굴에 집중해서 그 감정을 보여주기보다는 뒷모습이나 그가 있는 공간을 통해 느껴졌으면 했다.

미술감독과 콘셉트 논의를 할 때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 작품들을 언급했다. 이제는 참고로 삼기에도 너무 흔한 느낌이 드는 에드워드 호퍼. (심지어 그의 그림을 따라 한 TV 광고마저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그림은 어떻게 보면 이젠 더 이상 새롭지 않은데도, 아직까지도 늘 회자되고 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권하얀 미술감독은 그 이유를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 마음을 겹쳐보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역시 <환절기>가 그러한 영화가 되길 바랐다.

영화 초반에는 어두운 그레이 위주 톤에 직선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자연의 빛깔과 같은 다양한 색으로 전체적인 톤이 변화한다. 점차 밝고 생동감 있는 색으로 이동하는 것이 작품과 인물의 정서 변화와 비슷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다만 개별공간과 프레임에서의 색의 톤 일치와 조화는 늘 중요하게 염두에 둬서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영화 속 가장 특징적인 공간은 요양병원이었다. 미술감독과 함께 경기도 일대의 다양한 요양병원들을 미리 찾아가 보고, 작품 속 요양병원이 과거 모텔이었던 공간인 만큼 색을 많이 드러내고자 했다. (실제로 과거 모텔이나 숙박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는 병원을 다녀보니 실내 인테리어 등에서 그 특유의 과감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흥미로웠다.)


영화학교 구성원도 그렇지만, 함께 프로덕션과 후반 작업에 참여한 각 부문 스태프 중에는 이번 현장으로 처음 장편영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지영 PD는 오래전부터 제작부 일을 시작해 그동안 수많은 현장을 경험한 선배였지만 “모든 영화 현장은 누구에게나 처음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작품, 이번 동료들에 한해서만큼은 누구나 처음이다. 처음은 언제나 두려움 섞인 용기와 동시에 설렘 섞인 긴장감을 준다.

돌이켜보면 소위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말은 자기충족적 예언의 성격을 띤 수사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그런 작은 행운에 감사할 일이 많았다. 특히 내게 행운은 역할을 떠나서 작품을 아껴주고 헌신해준 배우와 스태프들을 만난 것이 아닐까.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그것도 3종류 다 다른 병원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데다, 차량 씬과 바닷가, 산속 야간 씬 등이 적지 않아 촬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더구나 촬영 기간 동안 때 이른 무더위에 폭염주의보까지 내려지고, 장마까지 겹쳤다. 각 파트별로는 내가 모르는 다른 곤란들이 더했을 것이다. 촬영 약속을 해두었던 강원도의 한 병원이 크랭크인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촬영 불가 통보를 해서, 촬영 도중 대안을 마련하고 촬영이 없는 날에도 계속 지방 헌팅을 다녔던 것은 그나마 작은 고비에 속한다. 12시간이 넘는 촬영은 기본이고, 한 회차에 도시와 장소를 네 곳 이상 옮겨가며 24시간 촬영 중 ‘정말 이건 무리다’ 느낀 적도 있다. 사실 이런 고생담을 전하는 건 진심으로 부끄럽다. 당연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특히 저예산영화일수록 더 그렇다. “그래도 우린 해냈어” 같은 일종의 정신력과 체력을 호기롭게 얘기하거나 서로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는 개인적으로 꺼려진다.

저예산독립영화일수록 더욱더 사람이 중요하다. 시스템이나 자본력으로 보완하기 힘든 한계 여건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개별 참여자의 컨디션과 에너지 관리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 주5일제와 휴식 보장, 주간에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너도나도 기본이 되기를. 저예산영화라고 최소한의 합리성마저 스스로 접거나 배척하는 경향은 사라졌으면 한다. 아무튼 힘든 와중에 모두 무사히 안전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고 정말 고마운 일이다.

<환절기>는 저예산영화라는 일반적인 틀에서 ‘영화학교 1기’라는 첫 시스템과 인력이 만드는 특수한 상황이 공존하는 프로젝트였다. 일반적인 저예산영화가 갖는 인적·물리적 한계점도 분명 있었고, 낯설고 예외적인 제작방식이 갖는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했다. 각 파트 스태프와 배우들 사이에는 다양한 경험치의 차이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었다. 현장에서 감독으로서 나는 이 특수성 속에 보편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선택과 해결점을 찾는 것이 늘 과제였다. 때로는 이 한계가 일부 대안적인 크리에이티브로 연결되기도 했던 것 같고, 솔직히 어떤 것은 여전히 모르는 채로 아직도 남아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망원동 어느 다락방 같은 곳에서 시나리오 첫 씬을 쓰던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흐른 뒤 그림 작가가 자신만의 그림체로 표현해 만화를 완성했다. 이제는 매력적인 배우들과 전문 스태프가 참여해 함께 영화로 만들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는 ‘환절기’라는 한 이야기가 세 가지로 존재하고 변화하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세계. 그리고 만화로 재현된 이미지와 분위기. 마지막으로는 개봉을 앞둔 영화 <환절기>의 시공간.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른 인물들과 이야기가 있다. (겸연스럽지만) 그러니 부디 만나주시길 부탁드린다. 영화로도, 또 책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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