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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독: 이전 시대의 끝, <늑대소년>의 프로덕션 순간들②

글:한경훈(조감독) / 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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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독: 이전 시대의 끝, <늑대소년>의 프로덕션 순간들②

2. ‘늑대소년’ 에피소드

2011.9.1 ~ 2011.12.20 프리 프로덕션
2011.12.21 ~ 2012.4.15 프로덕션. 총 67회차
후반 작업 후 2012.10.31.(개봉)


프리 프로덕션

너무나 감사하게도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났던 영화.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첫 시작은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었다. 물론 당시 감독님은 <남매의 집> <짐승의 끝>으로 한창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상업영화 스태프들의 눈에는 여전히 신인 감독이라는 색안경이 있었고 주연이었던 송중기도 지금은 아시아의 프린스지만 당시는 라이징 스타 정도. 박보영 또한 과거 히트를 친 경험이 있는 배우였지만 몇 년 쉰 후의 복귀작이라 주변에서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더군다나 다른 팀의 영화 만드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중 “뭐 대충은 알겠고, 그럼 너네 영화 내용은 뭐냐? ” 라고 물었을 때 “첫 사랑 이야기고 꽃미남 소년이 늑대로 변신해. 그리고 늙지 않고 나중에 할머니가 된 소녀와 다시 만나는 이야기야” 라고 했을 때 10명 중 9명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늑대로 변신한다고? 누가, 사람이? ...... 그게 되겠냐? 한국에서 판타지는 안돼!”

그들의 예상은 시원하게 틀렸지만 리얼리티의 맹신자! 한국 관객들의 특성을 우리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한가득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프리 프로덕션을 하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것들은 역시나 늑대. 송중기=철수 역이었다.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질까? 였다. 그 첫째가 우선 비주얼 문제. 소년이었을 때 모습과 늑대가 되었을 때 모습. 소년이었을 때야 뭐 중기가 워낙 꽃미남이라 걱정 안 했지만 늑대로 변신한 모습은 중기 본인과 모든 스태프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둘째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늑대소년이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몸짓, 감정의 표현들이었다. 왜냐하면 분명 이 영화는 사랑을 속삭이는 멜로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디테일한 연기가 필요했다.

20110906 철수 관련 회의록 중 일부

1. 눈
1안 : 사람 눈 → 늑대 눈
2안 : 늑대 눈 → 늑대 눈 (밝기와 동공모양)

2. 이빨
평소 : 사람이빨 같은데 송곳니가 도드라져있다. /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 4단계 정도

3. 손톱, 발톱
- 자르는 순간:1안. #18씬. (깨져있거나 울퉁불퉁인데 ---- 다듬어진다) / 2안. #28씬
- 자를 필요가 없다.
...............................................................
- 평소 : 노말한데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4. 구부정
#12 처음등장은 네 발 짐승
1단계
1안. 처음부터 인간과 만나면서 두 발로 다닌다.
2안. #27부터 두 발이 된다.

2단계
#28씬 --어느새 사람처럼 허리를 거의 핀 철수.

3단계
- #55 이후는 사람에 가까운데 의기소침해서 구부정한 것.
그 이후는 감정에 따라서 구부정의 모습이나 형태가 변한다.
- #40에서 인간적인 것보다는 동물적으로 구부정하게 돌아간 철수
단, 순이와 함께할 때는 인간에 더 가깝다.
...............................................................
* 개처럼 누워있는 것은 영화 전체적으로 계속적인 철수의 습관이다.
감정에 따라서 그 표현 수위만 조절
(귀엽게 엎드려있기도 하고 화가 날 땐 으르렁 거리면서 엎드려있다)
...............................................................


프리 프로덕션 단계 때는 이런 아이디어 회의를 수도 없이 한다. 보니까 초창기, 가장 기초적 회의라 좀 러프하고 정리가 덜 된 상태지만 이러한 아이디어 회의를 기준으로 야생의 철수가 사람이 되는 모습, 행동의 변화를 시나리오 흐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눠서 그 단계에 맞는 의상과 분장, 배우의 움직임, 자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또한 동물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배우 이준혁 선배(움직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두 달가량 중기가 트레이닝을 받았다. 러프 콘티가 나와 있는 상태였고 (기본적인 동선) 이것을 기준으로 씬 별로 준혁 선배가 동물의 기본적인 습관, 움직임을 보여주고 아이디어를 주면 중기는 그 움직임을 베이스로 본인 나름의 재해석한 연기를 했고 우리 연출부는 매번 연습장면을 찍고 감독님과 배우에게 전달했었다. 그리고 각자 그 영상을 보면서 촬영 전에 연출과 액팅을 시뮬레이션했고 조금씩 약점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관심사였던 철수가 괴물로 변신했을 때의 모습은 감독님이 직접 디자인을 해서 만들었다. 조성희 감독님의 주특기가 시각 디자인 전공에 CG 회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워낙 비주얼에 관해서는 본인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라 본인이 그린 괴물을 스태프들에게 보여줬을 때 모두들 굉장히 만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영상작업에서 단순한 스케치라도 시각화를 해야 이야기를 나누기도 편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기도 좋은데 괴물의 모습이 탄생하면서 의상, 분장, 특분, CG, 특효, 무술 등의 여러 파트에 준비작업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것은 영화작업에 있어서 매우 큰 장점이다. 분명 스태프들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1


2012년 2월 9일. 29회차 촬영 스케줄표
(스태프들끼리는 촬영 달력이라고 부르는데 촬영 내용을 간단하게 표시한 요약집 같은 거다)

#41D. 지태(유연석)가 순이(박보영)를 괴롭히고 때리는 것을 지켜보던 철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영화상 처음 괴물로 변신하던 날이었다.

밤 촬영이었고 지태와 그 친구들이 철수와 복잡한 액션을 찍는 첫날이었고 괴물로 변한 철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다가 관객들에게 처음 완전체를 보여주는 날이라 우리 영화에 흥망이 달린 촬영 날이라고 생각했었다. 낮부터 촬영장에는 스태프들,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액션 동선을 점검하고 그에 따른 안전장치, 와이어, 와이어 크레인, 액션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사전에 약속된 소품, 특수효과들을 준비하느라 에너지가 넘쳐났다. 나는 감독님들과 찍는 순서, 디테일한 세부 사항을 약속하고서 다시 그 결과를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겨울 촬영이라 해는 금방 넘어갔고 다들 저녁을 먹은 뒤 본격적인 밤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장은 전주 양묘장이라고 전주시에서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던 공터였는데 그곳에 순이 집의 외관 껍데기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오픈 세트장에서 며칠 촬영하며 안 사실이었지만 쓰레기 매립장이어서 그랬는지 밤이 되면 땅속에서 어떤 가스와 습기들이 올라와서 지표면을 뿌옇게 채웠었는데 이 습기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추위를 선물했었다. 이날도 고작(?) 영하 10도였지만 실제 우리가 느낀 체감 온도는 그 차가운 습기 때문에 더욱 덜덜덜 + 덜덜 이었다.

저 멀리 크레인이 올라가고 영화용 달이 뜨면서 현장 세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어서 2시간 정도의 특수 분장을 마친 중기가... 아니 늑대소년이 현장에 왔다. 그가 왔을 때 스태프들의 표정은 아직 생생하다. 풀 세트를 장착한 늑대소년을 사진으로만 본 사람도 있고 처음 본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맞나...? 맞을 거야... 맞나? 맞을 거야... 아닌가...? 맞을 거야.” 상상하던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 그것을 다시 영화적으로 만져서 극장에서 보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본인들도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시나리오라는 같은 글을 수십 번 읽으면 각자가 상상한 늑대소년의 모습은 서로서로가 다르고 내심 자신의 판타지를 닮았기를 바란다. 감독이 결정한 모습이 있음에도 말이다. 참 재밌는 현상인데 스태프는 작업자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첫 관객이기도 하다. 영화 스태프를 하며 자신의 상상과 현실을 이어보려고 하는 모습들을 볼 때면 참 진귀한 풍경이다. 꿈속에서 보던 백마 탄 왕자를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 농담이 아니고 딱 그거다. 그리고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여담인데 마찬가지 이유로 스태프들은 영화 작업을 하는 몇 개월을 시나리오를 통한 반복 학습을 하며 각자만의 상상 속에서 살게 되는데 이 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강력한지 나는 알고 있다. 한 예로 이전 멜로영화를 만들다 보면 현장에서 탄생하는 커플들이 유독 많았고 액션 하드코어를 찍다 보면 현장 분위기가 우울하고 드셌다. 공포 영화를 찍다 보면 꼭 세트장에서 귀신 봤다는 스태프들이 등장했고 한때 섹시 코미디 영화를 작업했던 나는.................. 흠. 어쨌든 그 날은 현장 스태프가 100명이 훌쩍 넘었고 모두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대규모 전투를 치르듯이 찍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관객들이 제발 괴물이 된 늑대소년을 처음 보고서 “에이 이게 뭐야! 말이 돼?” 라는 반응만 안 하길 빌며 촬영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새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또 난이도가 있던 촬영이라 그랬는지 예상치 못한 사고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괴물이 된 늑대소년이라 컬러렌즈를 꼈고 송곳니가 달린 가짜 치아를 끼고 있었는데 찍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액션 중 송곳니가 부러졌고 그 조각이 중기 목에 걸리는 사고도 났었고 눈에 낀 칼라렌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한 컷 한 컷 찍어가며 철수가 나쁜 놈들을 이리 던지고 저리 물리치던 #41D는 3일이 걸려서야 끝이 났다.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괴물이 된 철수가 차가운 입김을 내뱉으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다가 전주 밤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포효하던, 그 새벽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중기가 용기 있게 잘해낸 씬 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2


2012년 1월 3일. 9회차 촬영 스케줄표

#38B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철수와 순이. 둘 만의 데이트. 순이가 철수를 위해 자신이 만든 노래를 기타연주와 함께 들려준다.

보영이는 현장에 마스코트. 분위기 메이커였다. 싹싹했고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고 의외로 터프했다. 이날은 보영이가 프리 내내 연습하고 연습했던 기타연주와 노래를 뽐낼 시간이었다. 순이가 된 보영이는 거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철수는 마룻바닥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하는 순이를 지긋이 바라본다. 둘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중요한 씬이었고 아름다운 감정씬이었다. 두 대의 카메라가 순이를 향해 있었고 멜로의 뽀샤시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조명 감독 형은 앉아있는 순이의 뒤통수가 정말 타들어 갈 정도로 강력한 HMI 조명들을 몇 개나 설치했다.

연주를 시작하는 순이. 그 날의 첫 샷. 첫 테이크를 찍을 때의 그 순간.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A캠이 트래킹을 하며 순이의 메인 컷을 찍고 있었고 B캠은 약간 옆쪽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순이의 손과 얼굴 위주로 FOLLOW 하며 찍었고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거실 바닥에 앉은 체 그녀의 단독 콘서트를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음악 감독님 작곡. 감독님 작사에 ‘나의 왕자님’ 이란 노래가 시작되었고 이 넓은 전주 세트장에 아름다운 기타 연주와 순이의 수줍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뒤쪽으로 살짝 빠져서 이 촬영장 전체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뭔가 뭉클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스태프들 얼굴을 보니까 구경하는 남자 스태프들은 이미 눈이 달나라, 별나라로 향해 있었고 여자 스태프들은 ‘흥, 칫, 뿡’. 괜한 팔짱을 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났던 것은 노래가 끝나고 몇 초의 적막이 흐른 뒤 감독님의 컷 소리가 났는데도 보통 때 같았으면 컷 소리와 함께 다음 컷 준비로 소리 지르며 바로바로 소란스럽게 움직였을 사람들이 쥐죽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드 썬! 과 동시에 별나라 여행을 갔던 사람들이 최면이 풀리면서 지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가 보다. 그 후로도 몇 초가 지나서야 조심스레 다음 컷을 준비하기 시작한 스태프들. “이보게나, 정신들 차리게.” “아... 네. 네. 배시시” 미소 짓는 그들의 얼굴은 뭔가 밝고 따뜻하며 다정다감한, 원래 항상 착했던 사람들처럼 변신해 있었다. 조감독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 순간들은 참으로 신비하고도 놀랍다. 다음 컷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이 평소보다 더 신중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이쿠야. 안 하던 양보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애기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보영이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행복해진 것이다. 이 뜻은 그 장면이 본인들이 상상해왔던 것만큼 잘 찍혔다는 이야기고 관객들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씬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을 ‘영화 현장의 마법’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이 만족감에 취해 아드레날린이 급상승한 스태프들은 다시 최선을 다해 영화의 장면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이렇게 촬영을 하는 날은 안 봐도 뻔하다. 그 날 촬영 회차에 점수를 매기라면 분명 10점 만점에 100점이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3


2012년 2월 18일. 35회차 촬영 스케줄표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다.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자 적. 촬영장에 생기는 대다수의 변수들은 정말 정 안되면 스태프들이 으싸으싸 하던지 그것도 안 되면 결국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답이 없다. 촬영 스케줄이라는 것이 100명의 사람들, 그리고 각각의 팀들이 세팅하고 작업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시간, 수십 명의 배우들에 개인 스케줄들, 촬영 장소별 섭외 여건, 세트의 완공 시기, 비싼 소품과 장비의 대여 기간 등등등등.... 하물며 야식 먹는 시간까지. 거짓말 안 하고 수십, 수백 가지의 요소와 가능성을 생각해서 짠 거대한 테트리스 같은 건데 인간의 일들은 설득이란 게 있고 섭외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은 말이 없다. 그리고 이 변수 때문에 스케줄이 꼬이기 시작하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발생하고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초과되기 일쑤다. 한 예로 여름 장마 기간, 태풍에 크게 잘못 걸린 팀은 보름 가까이 쉬는 팀도 봤었다. 제작자, 피디 형들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도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날씨가 오락가락하면 그 날을 애초에 쉬는 날로 하느냐, 아니면 현장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를 타느냐의 판단도 늘 촬영 때마다 있는 가슴 졸이는 일이다. 보통 촬영장에 기본적으로 있는 스태프의 수가 70명가량이고 움직이는 차량이 십여 대가 훌쩍 넘는다. 서울에서 대기를 타고 있는 수십 명의 배우들은 계속해서 전화를 건다. “우리 촬영장 가요, 말아요? 찍는 겁니까, 안 찍는 겁니까? 언제 결정이 나나요?” 글을 쓰면서도 스트레스가 확 밀려온다.

어쨌든 우리는 겨울 촬영이었고 우리의 변수는 비. 눈. 한파였다. 그래서 애초에 메인 촬영 장소를 강원도나 북쪽이 아닌 남쪽 지방에서 찾았고 전주를 중심으로 촬영 장소를 선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상청을 통해 전라도 지역에 도시별 5년간 적설량, 강우량을 뽑아서 촬영 스케줄에 반영했다. 예를 들어 2008년부터 쭉 데이터를 뽑아보니 우리가 찍는 2012년. 짝수년이 더 추워서 비보다 눈 위주로 많이 왔고(다행히) 그 짝수년들을 보니까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 눈이 많이 내렸고 2월부터는 간간히 눈이 오더라. 라는 나름의 통계를 뽑을 수 있었다. 물론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국 기댈 수 있는 것은 반복적인 데이터였다. 그래도 갑자기 내리는 비와 눈은 하늘의 뜻이니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쨌든 이 자료를 디테일하게 반영해서 전주에 내려간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는 야외 촬영 없이 전주 세트장 안에서 내부 세트만 촬영을 하고 1월 이후에 야외로 나간다, 라는 큰 그림을 그렸고 만약 야외 촬영 중 눈이나 비의 변수가 생길 경우 당장 가까운 거리에 점프해서 촬영할 수 있는 예비 촬영 장소와 찍을 것들도 2안으로 준비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에 또 다른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위 스케줄 표에 나와 있는 눈 배경 장면이었다. 그것도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눈이 와 있는 추억의 별장을 노인이 된 순이가 찾아가는 장면과 영화의 에필로그. 혼자 남은 철수가 여전히 순이를 추억하며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 그래서 이 장면들은 고창 청보리밭에서 찍기로 했었는데 그 이유는 콘셉트에도 맞는 목가적 풍경을 가지고 있었고 전라북도 지역에서 눈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고 메인 거점이었던 전주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 반 거리라 전주에서 변수가 생길 시에 언제든 점프를 할 수 있는 장소였었다. 촬영 스케줄 상 이 씬들은 어느 날짜라고 픽스를 짓지 않았고 전주 야외 촬영 중 고창에 충분한 눈이 내리면 언제든 점프한다는 각오로 준비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2012년 1월 31일. 전주 양묘장 오픈 세트장에서 야외 촬영을 시작한 지 두 번째 날, 일기예보와 다르게 낮인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마당에서 감자를 우걱우걱 집어 먹는 철수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내렸다. 이곳의 촬영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고 긴급회의를 열어 고창 쪽 상황을 알아보니까 그쪽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 시간이 오후 1시 무렵이었고 고창 쪽에 지금 내린 눈이 쌓인다면 내일 점프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다음 날 까지 눈이 유지될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결국 그 날은 모두가 만세를 외치는 휴차(쉬는 회차)가 되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전주에는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전라북도 전 지역에 걸쳐서 내리는 비였다. 그리고 고창지역은 늦은 밤부터 비가 눈이 돼서 적설량이 5cm가 넘는다는 애매하고도 애매한 예보였다. 다시 긴급회의가 열렸고 제작부장과 내가 고창 쪽에 넘어가서 새벽 2시까지 상황을 지켜본 후 다음 날 고창에서 촬영을 할지 말지에 대해 상황보고를 하기로 했다. 사실 이 계획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다수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2월에서 3월로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눈 내린 들판 장면을 못 찍지나 않을까 하는 또 다른 걱정에 밀어붙이기로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스태프들 또한 전주 숙소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대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밤 12시부터 고창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쌓이지 않는 폭설. 싸리 눈이었다. 제작부장과 나는 쓸쓸히 전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2월이 가고 있었다. 3월이 되면 우리는 다른 촬영 관계상 전라도를 떠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제는 오히려 눈이 내리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중 날짜가 서서히 박혔다. 2012년 2월 18일. 이미 일주일 전부터 전북 지역 전역에 걸쳐 폭설이 예보돼 있었고 그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일기 예보의 확률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하루 전날 연출부 세컨 동생과 제작실장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창 청보리밭으로 급파됐다. 이날의 일기예보는 늦은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폭설이 예보되어 있었고 그 예보가 몇 일째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숙소에서 콩닥 콩닥 마음 졸이며 삼십 분에 한 번꼴로 체크 전화를 걸어서 욕을 먹던 중, 열 시를 넘을 무렵 희망찬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감독님, 눈 옵니다. 폭설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현장 사진이 날라 왔다. 대략 3cm 정도의 눈이 내린 상태였고 내일 오전까지 내리고 기온도 영하라고 하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빠르게 키 스태프들과 의논을 했고 다음 날 촬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낮 촬영이고 이동 거리가 한 시간 반이라 스태프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촬영장을 향했고 촬영장을 향하는 동안 오히려 폭설을 해치며 가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넓고 넓은 평야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때 저 멀리서 선발대로 와있던 연출부 동생이랑 제작실장이 새벽어둠을 뚫고 뚜벅뚜벅 눈을 맞으며 걸어오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장 넓은 샷을 우선 찍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넓은 벌판 위에서 철수가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날, 그리고 그다음 날 눈 내린 배경에 촬영은 순조롭게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찍었던 엔딩 장면을 우리는 추후 3월 14일. 대관령에 가서 재촬영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뭐 그런 것이 촬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영화 마지막에 눈사람 굴리는 철수의 장면은 대관령 촬영 분량이 쓰였고 그 외에 노인이 된 순이 장면은 고창 청보리밭 촬영 분량이 쓰였다.

3 마무리

영화 스태프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촬영 때는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 만땅 이지만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근질근질해지고 그리워지는 게 현장이라고. 그리고 다음 작품은 보다 내 취향과 잘 맞는 시나리오, 감독님과 작업하기를 늘 꿈꾼다. 내 취향에 맞는 일을 할 때, 나랑 잘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할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나의 손때가 뭍은, 내가 찾은, 내가 캐스팅한, 내가 찍은, 내 손으로 만든 나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장면들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그 희열이란 한 번이라도 맛을 보고 나면 중독이 돼서. 그래서 다시 영화 촬영장을 그리워하고 꿈꾸는 것 같다.

감독님들. 배우. 스태프들. 정해진 시간 속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같은 비바람을 견디며 영원히 기억될 영화를 만든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좋아서 이 일을 할 뿐이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길,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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