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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영화 (장선우,1997)

글:변성찬(영화평론가) / 20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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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영화

장선우는 ‘90년대의 감독’이다. 일단 그는 자신의 11편의 작품 중, 8편을 90년대에 만들었다. 그는 9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영화들이 없었더라면 한국영화의 지형도가 그만큼 단조로워졌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90년대의 감독’이다.

세 번째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1990)에서 열 번째 영화 <거짓말>(1999/2000년 개봉)에 이르는 장선우의 90년대 작품들 사이에는 형식적으로는 일관성보다 단절이 더 두드러져 보이지만, 주제적으로는 ‘성-정치학적 탐구’라는 강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포르노그래피’적 (홍보)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 일련의 영화들(<경마장 가는 길>(1991),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나쁜 영화>(1997), <거짓말>(1999))뿐만 아니라, 불교적 구도 여정의 우화인 <화엄경>(1993)이나 80년 광주항쟁을 재현한 <꽃잎>(1996)에서도 그는 성-정치학적 질문을 놓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유일한 예외는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씻김>(1995)일 것이다). 영화들 사이의 형식적 단절 또는 다양성은 이 질문을 수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 또는 통로에 가깝고, 그 외관상의 다양성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경향적으로 위(제도 또는 권력)에 대한 저항(풍자 또는 조롱)에서 아래(삶의 밑바닥)로의 침잠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쁜 영화>는 그 놓인 자리가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씻김>을 제외하면) 장선우의 90년대 영화 중 유일하게 원작소설이 없는 영화이고,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전환의 변곡점을 이루는 영화다. 원작소설을 매개로 하여(또는, 기대어) 자신의 화두를 펼쳐 보이던 장선우는 이 영화를 통해 거리의 삶이라는 밑바닥과 직접 조우한다. 영화 스스로의 설명에 따르면, <나쁜 영화>는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수현 감독의 ‘거리의 아이들’을 담은 단편에서 시작된 영화인데, 촬영 과정에서 장선우에 의해 ‘거리의 행려들’까지 담는 것으로 확장된 영화다. 이 영화가 변곡점을 이룬다는 것은, 이 영화 이전에 장정일의 원작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와 이 영화 이후에 마찬가지로 장정일의 원작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거짓말>(1999)이 그 태도와 스타일에서 전혀 다른 영화라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자가 전문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만든 일종의 ‘블랙 코미디’라면, 후자는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만든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전자가 풍자의 태도(또는, 제스처)로 만든 영화라면, 후자는 침잠의 태도가 두드러진 영화다. <거짓말>의 남자 주인공 J는 사디스트라기보다는 마조히스트에 가깝다(그는 스스로 ‘제도의 입법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따른 제의의 수행자’가 되려고 한다. 그가 진정으로 해방감을 드러내는 순간은, 자신의 집이 불타버린 이후이다).

<나쁜 영화>를 전후로 한 방향전환, 또는 장선우의 마조히스트 전략이 성공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거짓말>의 인물들이 짧은 해방 이후 다시 ‘거짓말’을 해야 하는 현실로 되돌아오듯, 어쩌면 장선우 또한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90년대의 장선우가 제도-권력에 대한 ‘도덕적 풍자’가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 대한 ‘윤리적 질문’의 길이라는 ‘아슬아슬한’ 시도와 실험해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시도가 단지 90년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는 것이다. 그 방향전환의 시도의 계기가 된 것이, <나쁜 영화>를 통한 ‘거리의 삶’과의 직접적인 조우다.

<나쁜 영화>를 두고 ‘페이크-다큐멘터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확하지 못하거나, 자칫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말이다. 이 영화는 극적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적 스타일과 방법을 차용하는 영화라기보다는, (비록 그래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었을지라도) 불가피한 경우 재연(reenactment)를 사용한 다큐멘터리에 더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장선우의 <나쁜 영화>가 지닌 영화적 의미는, 이 영화를 전후로 한때 붐을 이루었던 일련의 ‘학교가 아닌 거리에서의 청춘영화들(<비트>(1997), <주유소 습격 사건>(1999), <눈물>(200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친구>(2000) 등)’과 이 영화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거리의 삶을 ‘장르’라는 매개를 통해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거리의 삶과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그 아슬아슬한 시도는, 현재의 관점에서도 되새겨 보아야 할 충무로영화의 드물고 소중한 순간이다. 어쩌면 장선우의 <나쁜 영화>와 가장 높은 친연성을 보이는 영화는, 박기복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냅 둬!>(1999)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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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영화  Timeless, Bottomless (Nappeun yeonghwa)
1997 | 125분
감독 : 장선우
각본 : 장선우,김수현,그외 19인
출연 : 한슬기(나쁜아이들), 박경원(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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