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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1990)

글:김영진(영화평론가) /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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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거의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는데도 대중과 잘 만나지 못하고 비평적으로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배창호 감독의 <꿈>(1990)이 그런 경우였다. 화면의 격이라고 할까,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미묘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형식의 품격이 뛰어난데, 그만큼 주인공들과 격정적인 동일시를 느낄 관객의 처지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어서, 관객은 영화가 잘난 체한다고 느끼거나 심심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비평적 평가라도 올곧은 지지를 보내는 쪽이 있어서 그 영화가 외롭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대체로 저널리즘의 반응은 잘 만들었으나 흥행성이 약하다는 정도의 입장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배창호 감독은 <깊고 푸른 밤>의 역대급 흥행 이후 자기 예술세계에 대한 자의식이 깊어지면서 박력 있는 호흡의 대중영화 대신 롱테이크의 미감과 여백을 최대한 살린 <황진이>(1986)로 연출 색깔을 완전히 바꾸는 모험을 걸었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당시의 충격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영화의 예술적 가치에 비해 반응은 매우 박한 편이었다. 흥행사로 정점에 오른 감독이 보인 예술적 만용의 결과로 비판받은 <황진이>의 상영 이후 배창호는 긴 호흡의 영상미는 살리되 낭만적 사랑의 관념을 서민적 삶의 일상에 녹인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출했고 기성 영화에선 잘 다루지 않았던 부성의 책임감을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이웃 관계에 대한 향수를 섞어 따뜻하게 묘사함으로써 다시 한 번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고래사냥>과 비슷한 소재를 새로운 형식에 담으려는 시도였고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는데 그다음 작품 <꿈>은 설화적 구성을 현대적인 형식으로 담아내려는 배창호의 예술적 야심이 거의 완벽하게 구현된 영화였다.

이광수의 원작이 바탕인 <꿈>은 신상옥 감독도 만들었지만 배창호의 이 영화는 신상옥의 것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당시 충무로에서 가장 탄탄한 영화사였던 태흥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진 흔적이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영화는 그때까지 충무로가 아직 헤어나지 못했던 기술적 낙후성을 훌쩍 뛰어넘었으며 상당수 장면의 이미지들은 아날로그적 장인정신으로 충만하다. 승려 조신(안성기)이 자신이 수도하는 절에 온 달례(황신혜)의 미모에 반해 파계를 감수하고 달례를 좇아 속세로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내용은 두 사람이 평생 달례의 정혼자에게 쫓기면서 자신들의 가정을 꾸려 제대로 살려 했으나 운명의 도움을 받지 못해 비극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것이 제목 그대로 한갓 꿈이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이라는 걸 전제하고 시작하는 소설과 달리 이 영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놓고 주인공 조신의 깨달음을 꿈속에서 깨어난 결과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깜짝 놀랄 만한 장면들이 많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후반부에 아들을 산에 묻고 조신과 달례가 황폐한 골짜기를 걸어 돌아오는 장면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으나 그 과보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 앞에서 마냥 순하기만 했던 조순은 거의 실성하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가 달례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돌변한 채 다가가자 달례는 “이러지 마. 나도 힘들어”라고 말한다. 대체로 과묵했던 달례와 조신의 관계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이 대사가 주는 낯선 어감이 이물감을 주는데 화면에는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기 어린 아름다움과 서늘함으로 가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은 영화 초반 조신의 동료가 ‘두견새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감탄했던 서라벌 최고의 미모를 지닌 달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절의 큰 스님이 철쭉꽃을 따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달례에게 줄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조신에게 화면이 커트되고 카메라가 그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면 두견새에 비유된 여인에게 안기는 한 송이 철쭉이고 싶은 조신의 심정과 꽃을 딴다는 행위에 조응하는 파계에의 유혹 등의 감정이 연상되면서 절묘한 영화적 호흡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욕망의 과실을 따기 전의 설레는 감정과 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받는 잔인한 과보가 대비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촬영, 조명, 연기, 편집으로 섬세하게 뒷받침한 이 영화는 그 섬세함의 독자성을 굳이 헤아릴 이유가 없는 극장관람의 무심한 관성 앞에서 덧없이 무너졌다. 그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불멸성은 길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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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ream(Kkum)
1990 | 93분
감독 : 배창호
각본 : 이명세, 배창호
출연 : 안성기(조신), 황신혜(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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