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페이지 위치

HOME > 영화글 > 한국영화걸작선

고래사냥 (배창호,1984)

글:허남웅(영화평론가) / 2017-07-12  

FacebookTweet

게시판 상세내용

고래사냥

배창호 감독은 잘나가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불렸다. 당시의 배창호라면 <꼬방동네 사람들>(1982) <적도의 꽃>(1983)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등 사회성 짙은 영화의 감독이었는데 <이티>(1982) <레이더스>(1981) 등 오락 장르 영화를 만들던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부류로 묶이다니, 이 무슨 꼬방동네 이티 같은 발상인가 말이다.

사연이 있다. 때는 1984년, 북미 개봉 2년 뒤에 한국에서 공개된 <이티>는 전국에 이티 열풍을 불러오며 청소년 관객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그해, 배창호 감독은 <고래사냥>으로 한국영화 전체 흥행 1위의 기록을 세우며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바로 ‘흥행’이라는 키워드가 배창호 감독을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명명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마케팅업자의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당대의 한국 영화 팬들은 <고래사냥>을 <이티>만큼 재밌게 보았다.

내가 <고래사냥>을 본 건 극장이 아니라 몇 년 후 TV를 통해서였다. 아마도 국민학교, 엇! 이렇게 연식이… 음, 초등학교 5, 6학년 때인 걸로 기억한다. 힘 약한 우리의 주인공들이 거구의 깡패와 벌이는 추격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이티>에서 이티를 고향 별로 보내려고 마을 아이들이 정부 소속 요원들을 피해 접선 장소로 가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다고 쓰고 보니 나 역시 단순하네…

아무튼, 영화의 내용인즉, 소심한 병태(김수철)는 거지꼴의 민우(안성기)에게 끌려 창녀촌에 갔다가 말을 하지 못하는 춘자(이미숙)를 만난다. 춘자에게 한눈에 반한 병태는 엄마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램을 이뤄주기로 한다. 병태는 민우의 도움으로 춘자를 창녀촌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깡패들(이대근이 이 무리의 두목을 연기했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걸핏하면 시각장애인 행세에, 시도 때도 없이 각설이 타령을 불러대는 민우의 매력에 빠져, 지금도 아름다우시지만, <고래사냥> 출연 당시에는 더 아름다우셨던 춘자 역의 이미숙의 미모에 눈길을 뺏겨, <고래사냥>을 보고 있으면서도 불만이었던 하나는 “난 고래를 잡아 올 거예요” 병태의 뜬금없는 대사였다. 사실은 병태 얘가 한몫 잡으려고 춘자 핑계로 우도에 가서 민우의 도움을 받아 고래를 생포하나 보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더랬다.

근데 웬걸, 잡으라는 고래는 안 잡고 춘자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준 후 민우가 병태에게 하는 말, “병태 너는 춘자의 마음속에 예쁜 고래로 남아 있을 거야” 그럼 병태가 사람으로 환생한 고래였던 거야? 깊은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의 순진한(?) 상상력은 실제 고래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고래사냥>을 그냥 재밌었던 영화로만 기억에 남겼다.

2008년 5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배창호 감독의 특별전을 기념해 한때 기자로 재직했던 영화지에서 20페이지 대특집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때 배창호 감독은 “영화가 치료이자 위로가 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주고 싶은 위안은 당신 안에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있다는 것, 자연치유력이 있다는 것, 일깨우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게 지금까지 내가 영화에 담아낸 것들이지”

이게 배창호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때 <고래사냥>은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고래사냥>의 ‘고래’는 갖기 힘들지만,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어떤 가치의 상징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그랬다. <고래사냥>의 민우는 병태가 좋아하는 여자와 짝을 맺어주기 위해 대학교를 찾는다. 그때 민우를 보고 어느 교수가 아는 체를 하지만, 민우는 앞을 못 보는 척하며 자기 정체를 부정한다.

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전두환 정권 당시에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느꼈을 절망감이 민우와 병태에게 투영되어 있다. 민우는 그런 시대의 검은 공기에 좌절하여 속세로부터 거리를 둔 인물처럼 보인다. 고래를 잡을 거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는 병태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사람보다 크게 느껴진다. 춘자 역시 꽤 상징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건 말을 하지 못하는 설정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억압적인 정권 아래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민중의 상징으로 보이는데 민우가 부러 시각 장애인 행세를 하는 맥락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서울을 떠나 찬 바람이 쌩쌩거리는 길을 걷고 또 걸어 따뜻한 남쪽 우도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에 넣고 싶지만, 당장에 손에 넣을 방법이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운명. 병태를 연기한 김수철은 이 영화에 출연하던 당시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음악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5개월 동안 촬영진과 함께하며 영화음악도 담당했던 김수철은 명곡 <나도야 간다>를 완성했다.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고래사냥>을 오랜만에 보며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국의 현대사 자체가 고래를 사냥해온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직선제의 고래를 잡았다가 놓쳤던 아픔이 있고, 검열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표현의 자유라는 고래를 구출한 경험도 했고, 전(前)대통령과 그 비선에 고래를 빼앗겨 다시 찾아 오기 위해 광장에 모였던 기억도 불과 얼마 전이었다. 배창호 감독은 <고래사냥>을 비롯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안주할 수 없다는 것, 참 존재, 가치를 찾을 때까지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로드무비도 몇 편 했고.” 그렇다, 병태와 춘자와 민우의 <고래사냥>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관련영화

고래사냥

고래사냥  Whale Hunting (Goraesanyang)
1984 | 112분
감독 : 배창호
각본 : 최인호
출연 : 김수철(병태), 이미숙(춘자)...

관련글 전체게시물 0

  • 관련글이 없습니다.

등록

최근 등록 영화글

올드보이

[한국영화걸작선]
올드보이

앨리스

[애니초이스]
앨리스

안녕 히어로

[다큐초이스]
안녕 히어로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당신이 몰랐던 <영화와 공간: 홍콩> 뒷이야기

[영화현장]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당신이 몰랐던 <영화와 공간: 홍콩> 뒷이야기

모래의 혹성

[애니초이스]
모래의 혹성

TOP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