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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정 (홍상수,2000)

글:변성찬(영화평론가) /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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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정

한 감독의 새 영화를 보고 나서 그/그녀의 이전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과는 다른 일일 것이다. 특히, 홍상수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관성 때문이다. ‘반복’은 그의 개별 영화들의 구성 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영화들 사이를 잇는 창작의 원리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들은 소급적인 ‘반향효과’를 통해서 더욱 두터워지고 깊어진다. 근 20편에 이르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단계를 설정하는 일, 그리고 그의 영화들 사이에서 걸작과 태작을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모든 개별 영화들은 단 하나의 연작 중 일부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항적 대칭 구조’의 형식을 취한 홍상수의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를 보고 나서,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던 그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그 ‘반향효과’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오! 수정>에 대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오! 수정>은 표면적으로는 5개의 소제목이 붙은 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안에 동일한 과정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기억 사이의 대비가 함축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재훈(정보석)과 은주(이은주)는,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수정, 또는 결혼)’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 세계 속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커플이자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커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시민 케인>이나 <라쇼몽> 같은 ‘기억의 모호성’을 다루는 영화들의 계보 안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전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강원도의 힘>(1998)에 비해 좀 더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나는 어떤 변화의 징후로 읽었다(부정과 냉소에서 긍정과 유머로의 이행). 하지만 ‘반향효과’ 안에서 본 <오! 수정>은, 그 첫인상이라는 것이 일종의 오해, 또는 절반의 이해에 불과했던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오! 수정>은 ‘기억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도 아니었고, ‘낭만적 해피엔딩’의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남녀 사이의 기억의 차이는, 홍상수가 이항적 대칭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다른 많은 이항들(가령, 서로 같은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경유하는 두 인물, 서로 다른 공간-분위기에 놓인 한 인물, 현실과 꿈 등)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 역시 낭만적 낙관의 반영하는 거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거울이었다.

무엇보다 분명해진 것은, 홍상수의 일부 영화(특히, 초기영화)에서 나타나는 ‘이항 구조’가 사실은 처음부터 ‘n항 구조’에 이르기 위해 취한 방법론적 선택이자 제약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후 영화에서 나타나는 삼항 구조나 옴니버스 형식과 같은 다양한 형식적 변주는, 어떤 질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이 ‘이항 구조’의 양적인 확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홍상수에게 ‘구조’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구속이다. ‘불안’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이다. 이 제약에는 서사형식으로서의 ‘구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스타일적 요소들(가령, 고정쇼트, 미디엄쇼트, 롱테이크 등)도 포함된다. 홍상수는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제약 안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마주친 우연에 따라 ‘즉흥연주’를 한다. 특정한 ‘공간-분위기’와 ‘배우-인물’이 조우하는 순간, 그의 반복되는 즉흥연주가 시작된다. 홍상수는 그 자유(우연의 수용)와 즉흥연주를 “어떤 당위나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 어차피 선택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벗어나고자 하는 그 ‘당위나 나쁜 습관’은 세상의 그것(상식과 통념)이자 동시에 영화의 그것(관습적 재현 양식)이다.

대개는 ‘불륜관계’를 포함하는 남녀 사이의 다양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드라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줄거리 안에 결코 ‘법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예외적으로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륜’ 때문은 아니었다). 홍상수는 그가 발견하고 재구성해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굳이 법정에 서지 않아도 그 인물들의 내면에서 언제나-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떤 ‘법의 힘’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하고 저항하고 있다. <오! 수정>의 밝고 귀여운 인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적 방법은 가부장제의 법이 작동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이지만, 그의 근본적인 영화적인 화두는 그 법의 외부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어떤 삶’의 지평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 영화의 본질은 ‘일상의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삶의 리얼리즘’에 있다. 홍상수는 언젠가 그것을 “완전한 구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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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126분
감독 : 홍상수
각본 :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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