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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감보 Mogambo (1953)

글:허문영(영화평론가) /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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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감보 Mogambo (1953)

‘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모감보>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기병대 The Horse Soldiers>(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벤허>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모감보>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솔로몬왕의 보고>(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모감보>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모감보>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모감보>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도망자> <웨건 마스터> <태양은 밝게 빛난다> <라이징 오브 더 문>)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말없는 사나이>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모감보>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모감보>는 <역마차>(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모감보>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역마차>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모감보>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모감보>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역마차>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모감보>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황야의 결투>의 와이어트 업,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웨건 마스터>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샤이엔의 가을>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모감보>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역마차>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역마차>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모감보>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모감보>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허리케인>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3인의 대부 3 Godfathers>(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아파치 요새>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젊은 날의 링컨> <모감보> <라이징 오브 더 문>),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모감보>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역마차>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모감보>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모감보>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역마차>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모감보>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모감보>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모감보>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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