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페이지 위치

HOME > 영화글 > 영화칼럼

[80년대 한국영화, 카오스의 이색지대] 1. 1980년대라는 카오스

글: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 2017.11.09  

FacebookTweet

게시판 상세내용

[80년대 한국영화, 카오스의 이색지대] 1. 1980년대라는 카오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에게 1980년대는 곤란한 시간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박정희의 죽음을 겪고(등굣길에 길에서 우는 수많은 할머니들을 보았다), 3학년 때 5.18이 있었으며(서울 변두리에 살았는데 동네 큰길에 정말 아무도 없었다), 4학년 때 집에 컬러텔레비전이 들어왔던 게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1980년대를 제대로 경험한 건 분명하다. 동네 삼류극장의 추억, 올림픽 때문에 샀던 VCR, 학교 앞 만홧가게 쪽방에서 보던 포르노, <영웅본색><천녀유혼>…. 1980년대는 나에서 문화적 요람기이며, 지금의 취향이 형성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때 따먹은 선악과 때문에 난 아직도 어떤 원죄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며, 이런 연재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런 무의식의 발로일 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줌-아웃 하여, 그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에게 ‘1980년대’는 분명 살긴 했지만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10년이기도 하다. 그 시절 영화를 연구해 보겠다고 나선 입장에선 더욱 난점이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1980년대처럼 이상한 시기는 없기 때문이다. 10년씩 묶어서 뭉뚱그리는 수사법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는 대충 10년 단위로 어떤 레이블이 붙는다. 1960년대가 황금기로서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이 여러 감독에 의해 시도되었다면, 1970년대는 그 모든 성과물들이 ‘유신 체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른바 ‘암흑기’로서, 전 세계 영화계가 ‘뉴 시네마’의 열풍에 휩싸일 때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용어 안에 갇혀 외화 쿼터와 국책 영화라는 당근과 채찍에 길들어 갔다. 그 시기에 이만희와 하길종이 요절했던 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시대의 공기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1일에 개봉된 두 편의 한국영화. <타인의 방>(김문옥)과 <어느 여대생의 고백>(김선경).
모두 이영옥이 주연을 맡은 멜로드라마다.

1990년대는 ‘기획 영화’가 등장하며 한국영화의 자본 구조가 천지개벽을 겪었고, 이런 물적 토대의 변화를 기반으로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으며, 산업적 팽창은 2010년대 독과점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치 공란처럼 존재하는 1980년대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이 시기를 대표하는 표제어는 존재한다. 바로 ‘3S 정책’이 그것이다.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애마부인>(정인엽, 1982)의 심야 상영을 필두로 에로티시즘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만약 1980년대를 ‘3S 정책’으로 설명한다면, 이 가설의 장점은 연속성이다. 1970년대 유신에서 1980년대 3S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의 억압적 문화 정책에 의해 한국영화는 긴 침체기에 빠졌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단점은 1990년대와 연결할 때 발생한다. 20년 가까이 침체되었던 한국영화가 1990년대 초 갑작스레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건 계기는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뭔가 다른 시대 규정이 필요한데 아마도 ‘코리아 뉴웨이브’가 그런 시도일 것이다. 이것은 ‘서울의 봄’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충무로에도 새 바람이 불었다는 가설이다. 1980년대 전반기의 이장호배창호, 후반기의 href=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01772>장선우와 박광수가 그 기수였는데, 그들의 등장으로 인한 변화는 1990년대의 성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난점은, 당대의 영화가 1970년대와 어떻게 단절을 이룰 수 있었는지의 문제다. 그리고 과연 ‘뉴웨이브’라 부를 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의외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던 게 1980년대 영화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2002)과 박흥식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2005). 영화 속에서 김득구(유오성)는 연인과 함께 심야 상영으로 <애마부인>을 보고, 아이들은 동시 상영관에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를 본다.

19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부정적이고, 1990년대의 전사로 받아들이면 긍정적인 1980년대의 한국영화. 3S와 뉴웨이브가 공존했던 불균질 적이며 돌발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규정할 수 없는 시기. 이번 주부터 격주로 이어갈 연재는 바로 그 시대에 대한 글들이다. 명료하게 정리할 야심은 없다. 그럴 수 없는 시대였으며, 그런 ‘쉽게 파악되지 않는 속성’이 이 시대 한국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서 하나. 기존에 이뤄진 이 시기 감독들에 대한 작가 연구에 글 하나를 보탤 생각은 없다. 이 연재는 그 시기 가장 대중적이었던 영화들에 대한 재평가다. 에로 영화, 하이틴 무비, 코미디, SF 아동 영화 등 당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휴지처럼 소비되던 영화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1980년대’라는 시대 구분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1982년 <애마부인>부터 1992년 <결혼 이야기>(김의석) 직전까지, 즉 에로 영화가 본격화되고 기획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영화를 중심으로 다룰 예정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 1980년대엔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졌을까? 1960~70년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걸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1980년 한국영화 흥행 1위는 364,538명(이하 모두 서울 관객수)의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였다. 1981년은 287,929명을 동원한 윤정희 주연의 <자유부인>(박호태)이었다. 기존의 신파 멜로가 이어지던 형국이었고, 이때 1982년에 <애마부인>이 315,738명을 기록하며 그 해 1위 자리에 오르면서 충무로의 풍토를 바꿔 놓았다.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과 <애마부인 2>(1984).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 프랜차이즈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에로틱 멜로드라마, 이른바 ‘에로 영화’는 돌연변이였다. 1960년대 신파 멜로에서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로 오면서,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가벼운 수준의 노출이 감행되었다면, 1980년대 에로 영화들은 국가 정책의 조장 속에서 영화의 특정 요소를 다소 지나치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굳이 에로 영화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쉽진 않겠지만 1980년대 대중 영화를 뭉뚱그릴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그건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 필름’일 것이다. 번역하기 쉽지 않은 이 용어는 풀어서 해석하면 ‘특정 관객의 취향에 호소하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상업영화’라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한국영화는 상당 부분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섹슈얼하고 에로틱한 부분에 그치지 않았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 청춘 영화로 이어지며 로맨스 부분이 대폭 강화됐고, 액션 영화는 수많은 아류 스타일의 영화로 가공되었다. 정식 합작영화도 있었지만 위장 합작영화도 상당했고, 합작과 무관한데 제목만 중국 영화인 척하는 한국영화도 부지기수였다. 이 영화들은 모두 무협 팬들을 위한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으로, 극적 개연성 없이 대결 액션 신으로 꽉꽉 채운 영화들도 등장했다. 저예산 호러도 1980년대 중반까지 심심찮게 이어졌다. 코미디도 마찬가지였다. 이주일, 김형곤, 심형래 등 당대의 인기 코미디언과 개그맨의 유행어와 개인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심형래는 <우뢰매> 시리즈를 통해 아동 영화 시장을 붐업 시켰고 수많은 유사작들이 등장했다.


<평양 맨발>(남기남, 1980)의 이주일과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이 시기 영화를 더욱 기묘하게 만든 건 크로스오버(crossover) 현상이었다. 여기서 요즘 콘텐츠 전략에서 언급되는 ‘원 소스 멀티 유즈’ 같은 개념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1980년대에 영화라는 콘텐츠는 타 분야와의 경계선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최근 ‘연기돌’들이 나름 착실한 연기 수업을 바탕으로 연기자에 도전한다면, 1980년대엔 인기 있는 가수는 별 장벽 없이 배우가 되었다. 조용필, 심수봉, 인순이 등이 모두 영화를 찍었고, <마음 약해서>(심우섭, 1980)나 <모모는 철부지>(김응천, 1980) 처럼 당대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도 많았다.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처럼 개그맨의 유행어를 그대로 제목에 가져온 영화도 부지기수였다. 만화의 영화화가 본격화된 것도 1980년대이며, 의외로 많은 리메이크와 프랜차이즈(와 외화 표절) 영화들이 있었다.

이처럼 쉽사리 정리되진 않지만, 그 카오스 속에서도 어떤 묘한 질서를 찾아볼 수 있는 1980년대 영화들. 다음 글에선 좀 더 세부적으로 접근해보겠다. 그 첫 대상은 에로 영화로 건너가는 가교 역할을 했던,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 불리었던 영화들이다.


관련글 전체게시물 0

  • 관련글이 없습니다.

등록

TOP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