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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부터 다시

글:장건재(영화감독) /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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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부터 다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07년 10월은 첫 장편영화 <회오리바람>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 지역 영상위원회 등에서 제작지원을 받았고 그 돈을 밑천 삼아 항해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제작지원은 너무 많이 떨어져서, 항상 얼마라도 받을 수 있을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맞다. 그런 운은 자주 따라주지 않는다. <잠 못 드는 밤>은 어디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해 생활비를 털어 만든, 내 영화 중 가장 가난한 작업이었다) 돈 백이라도 절실히 필요할 땐 기회가 오지 않더니… 그땐 제법 운이 따라주었다.

<회오리바람>은 지나온 나의 십 대를 반추하며 쓴 시나리오라 대중적인 가능성보다는 온전한 나만의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었다. 당시엔 장편영화로 데뷔한다는 거창함보다는 학교를 벗어나 작업하는 첫 영화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작업 과정은 학생으로서 영화를 만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스트푸드 가게의 한가한 자리를 차지하고 하루 종일 스태프 회의를 하거나 배우들과 좁은 자취방에서 다리를 오므리고 리허설을 했다. 함께 한 동료들 누구도 주도적으로 장편영화를 이끈 경험이 없었다. 반백수 상태로 서른을 넘기고 있었지만 뭐라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순간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영화를 만들면서 생긴 빚을 막 청산한 때였고 공부를 길게 하면서 생긴 학자금 대출도 아직 남아 있었다.

<회오리바람>은 그로부터 3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개봉했다. 개봉하던 날 밤 무대 인사를 위해 배우들과 대기실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흥분된 감정을 추스르던 때가 떠오른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불이 켜지고, 배우들과 무대에 올랐을 때 객석엔 오직 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두터운 목도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이제 막 극장을 나가려던 그를 붙잡고 한참을 신나게 떠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꽉 찬 객석을 상대하는 사람들처럼 충만한 마음으로 관객과의 대화에 임했다. 한 명의 관객을 위해 공연을 올렸다는 어느 연극배우의 쓸쓸한 일화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지난하게 작업했던 영화를 개봉관에 선보인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 같다. (3년 뒤 여름, <잠 못 드는 밤> 개봉 무대인사 땐 아예 관객이 없어 행사 자체가 취소된 적도 있다. 주연배우 김수현 선배와 마케팅 팀장님과 그냥 돌아서기가 헛헛해 아리랑 고갯길을 걸어 내려와 돈암 시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오이채 잔뜩 올린 시원섭섭했던 콩국수의 기억…) 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떻게 시장에서 비용을 회수(해 다음 작업에 투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흘러왔다. 나는 그저 쉬지 않고 작업한다는 마음뿐이었고 그저 실낱같은 행운이 조금씩 따라주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3년에 한 편씩,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마치고 나서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숨을 고르면서 지냈다.

다시 원점에 선 느낌이다. 스물두 살 때 뵌 적이 있는 한 중견 감독께서는, 오랜 시간 영화를 만들어 와서 이제 좀 수월해질 법도 한데 만들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야, 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거기에 내 고민을 조금 덧대어 보면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할 것 같은 것’ 사이에서 종종 길을 헤맨다. 그럴 때면 매번 영화 만들기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내게 ‘하고 싶은 것’은 작업자로서의 영화 만들기다. 단 한 점의 시나 그림 또는 음악으로 완성되는 예술가가 없듯이 작업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란 반복되는 일상처럼 매일 비슷한 노동을 이어가며 조금씩 완성에 다다르는 일이다. 거기에 낭만이 깃들 자리는 없다.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사람은 없지만 오로지 본인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그건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로서의 ‘영화감독’과는 조금 다르다. 직업인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는 ‘해야만 할 것 같은 것’이다. 거대 투자 자본의 욕망과 창작자의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대중을 상대하는 일로서의 영화 만들기. 말하자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영화. 이야기를 찾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큰 자본이 필요한 지점과 만나게 되고 어느 경계를 넘어서면 어느새 영화는 자본의 편에 서 있다. 매번 그 언저리에서 돌아 나와 하던 대로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 대기업 회사원과 골목길 자영업자의 차이 같은 거라고 봐도 될까. 그래서 내 작업을 독립영화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자본과 예술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감독들이 있다. 그리고 대개는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요즘 준비하는 영화는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아직 시나리오는 마무리되지 않았고 가능성은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많은 사람들과 회의도 하고 공동작업도 한다. 명성 있는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함께 작업하는 걸 상상해보기도 한다. 수십억 단위의 예산도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다 문득 어? 이게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걸까, 반문한다. 나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니다. 모든 영화감독들의 숙명이니까.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순진한 표정을 짓기엔 자본의 힘은 무지막지하고 극장 생태계는 거의 파괴 직전이다. 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위험한 길이라도 감수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제든 돌아 나와 내 방식대로 새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완전히 새롭게 해보고 싶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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