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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박배일,2017)

글:남다은(영화평론가) / 20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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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여느 시골의 한적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산이 있고 밭이 있고 쪼그리고 앉아 모종을 심는 노인들과 다른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는 그들의 주름진 손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모습으로 살아내기까지 그들이 지나온 시절의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그 모습 위로 조곤조곤 들려온다. 기구하고 곡절 많은 각각의 사연들은 그들 개인의 과거이자, 이곳 소성리의 역사다. 그들은 여성이고 농민이다. 영화는 찬찬히 둘러보고 진중하게 들으며 시작한다. 지금 ‘국가’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방적인 힘이 무엇을 망가뜨리고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우선 보라는 듯이. 노년의 여성 농민들은 경찰 떼거리와 장갑차와 헬기 소리와 극우 단체들의 악다구니와 일방적인 여론에 포위된 소성리의 참혹한 운명에 대해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만다. 6.25 때와 같아. 우리는 겪었으니까 알제.

소성리의 역사 저 밑바닥에 묻힌 채 말없이 공유되던 불길하고 두려운 전쟁의 트라우마가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빨갱이’로 지목된 수많은 사람들이 숨고 잡히고 처참하게 살해되던 과거의 시간을 숨죽이며, 여전히 공포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지금은 국가의 안보에 반하는 이기적인 ‘빨갱이’ 집단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어이없고 끔찍하며 비틀린 상태로 되살아나 소성리의 일상과 자연을 다시 뒤흔드는 저 국가, 아니 이데올로기, 아니 망령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한국전쟁과 사드 사이, 줄곧 이곳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생존해온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시간들에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것이 박배일<소성리>가 품고 있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영화가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그가 ‘밀양’에서 했던 방식과는 좀 차이가 있다. 그의 카메라는 ‘할매’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싸우며 찍는 대상들과의 경계를 최대한 좁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선 다른 무언가로서 소성리의 현재를 바라보려고 하는 것 같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열정적인 농민운동가 순분은 남편을 떠나보낸 후, 자신의 주변 곳곳에 출몰하던 귀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이내 화면에도 귀기가 서리기 시작하는데 카메라는 마치 감독의 손을 벗어나 혼자 걸어가는 것처럼 적막한 산길을 정처 없이 휘젓고 나아간다. 그 움직임 위로 그녀의 음성이 드리워진다. “산, 거기 집적거리면 안 좋아. 골프장 거기 사람 많이 죽었다. 그래도 소문 하나 안 낸다, 그것들.” 사드 배치 부지로 결정된 골프장이 저 아래 보인다. 과감하게 흔들리고 요동치는 악몽 같은 움직임으로 이 산을 오른 카메라의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여성 농민들의 땅에 발을 붙이고, 그들의 투쟁을 지켜보다가 마을 하늘을 가로지르는 헬기를 바라보던 영화는 자신이 직접 그 헬기의 시점이 된 것처럼, 소성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 풍경 위로 한국전쟁에 대한 이들의 아픈 기억들이 하나씩 꺼내진다. 그때, 경찰의 헬기와 같은 방식으로 소성리의 창공을 유영하며 굽어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또 누구의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인물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기괴하게 활보하는 이 시선들의 영화적 자의식에 대해서라면, 박배일의 지난 궤적들을 경유해서, 혹은 최근 다큐멘터리들의 어떤 경향과 관련해서 분명 냉정하고 면밀하게 살펴볼 만한 지점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두 시선을 통해 지금 이 지면에서 물을 수 있는 건, <소성리>가 싸움의 주체나 싸움의 현장에 앞서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다. 그것은 오랜 시간 그 땅이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역사적 상흔들, 그러니까 아직도 떠나지 못한 한 많은 죽음들, 사람들은 망각 속에 묻어두려 애썼으나 땅만은 생생히 기억해 왔을 순간들이다. 이 영화는 그 죽음의 기억들을 대면하지 않고 소성리의 현재를 말할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니 일단은 아마도 영화는 이렇게 반문할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장면들 속) 카메라의 저 모호하고도 과감하며 무엇보다 인간에게 귀속되지 않는 것처럼 경험되는 시선들은 그 기억들을 다시 불러오려는 영화적 제의이자, 소성리의 싸움에 동참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영화적 시작점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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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소성리  Soseongri
2017 | 89분
감독 : 박배일
각본 : 주현숙,김주미,박배일
출연 : 김의선, 도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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