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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되는 법 (손경화,2014)

글:지민(다큐멘터리 감독) / 201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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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되는 법

어두운 화면 한가운데에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 하나 나 있다. 우뚝 솟은 건물들과 푸른 하늘이 보인다. 창틀에는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빛나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전에 끊긴 집일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천천히 떨어진다. 의자는 곧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은 <의자가 되는 법>이다.

<의자가 되는 법>을 만든 손경화 감독과는 오래된 동료이자 친구다. 의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여물지 않은 수다부터 구체적인 기획안이 나올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태프로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없이 수락했던 것은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업을 할수록 나에게 이 영화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의자는 정직한 사물이다. 몸과 닿는 부분이 많고 앉는 이의 무게를 나눠 가지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 만들어도 금세 불편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기능이 온전히 형태로 드러나는 가구이기도 하다. <의자가 되는 법>의 등장인물 중한 명인 가구 디자이너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어려워서 가장 재미있는’ 가구, 그래서 만들어보고 싶은 가구다. ‘흙’이라는 예명을 쓰는 작가는 거리에 버려진 의자를 주워다가 새로운 의자를 만든다. 새롭게 만드는 사물로 의자를 택한 건 ‘사람들이 많이 버려서’라고 할 만큼 의자는 흔하다.

의자는 앉는 사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감독은 기획의도에 “불편한 의자는 있어도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의자는 없다”고 썼다. 의자를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딘가 불안했다. 의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니까 이런 걸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의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 지금의 노동시장에서 의자의 역할, 대량생산되면서 모양이 변해버린 의자. 하지만 감독은 계속 버려진 의자를 찍었고, 출연자들에게 무한도전 중에 좋아하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물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논리적인 구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걱정을 하느라 정작 영화가 말하려는 것을 계속 놓치고 있었다.

영상자료원에서 ‘등받이 제작자’(펀딩 사이트를 통해 후원해준 분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을 모시고 첫 상영회를 하던 날이었다. 수없이 많이 봐온 장면들이었는데, 그제야 영화가 보였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의자의 높이조절 실린더를 테스트하는 공장노동자의 표정, 정성스레 청소하는 카페 주인의 손길, 텅 빈 바닷가에 놓인 낡은 의자를 찍는 사진가, 고심 끝에 산 의자를 배달받은 사람의 들뜬 기분과 버려진 의자 주변의 풍경이 보였다. 거리에 버려진 의자가 꼭 나처럼 느껴졌다.

쓸모로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내야만 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그 쓸모는 정해진 기준에 맞춰 계량화된다. 때로는 시험점수로, 자기소개서로, 혹은 실적으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나’는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특별해지고 쓸모 있어지기 위해서 나 자신을 소진시키며 버티는 시간,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 안에 갇혀 스스로를 돌아볼 틈조차 없이 달려야 하는 사람들. 아닌 척했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대학 동기들의 승진 소식을 듣거나 같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던 동료들의 수상 소식을 들으면 조급해졌다. 나만 뒤처져있는 기분이었다. 부족한 나를 계속해서 부정하며 더 잘해낼 수 있을 거라 채찍질했다.

<의자가 되는 법>은 그저 묵묵한 태도로 버려진 의자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생명을 담는다. 그 태도가 의자와 닮았다.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 하는 것, 존재 자체로 서로를 귀히 여기는 것 같은 그 모습이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주었다.

이윽고 화면은 쏟아지는 비로 가득 찼다. 맑게 갠 하늘. 도시 공터 풀숲에 놓인 의자는 한결 단단해진 듯 보였다.

영화는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삶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편안한 의자 같은 영화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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