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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 (주현숙,2017)

글:이승민(다큐멘터리 연구자) /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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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

주현숙 감독의 신작 <빨간 벽돌>을 보다 불쑥 떠오른 우화가 하나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 돼지들이 각기 다른 재료로 집을 짓는다. 짚과 나무로 집을 지은 첫째 둘째의 시행착오를 거쳐, 셋째 돼지는 벽돌로 튼튼하게 집을 지어 늑대의 공격에 맞선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이다. 이 우화의 결말은 디즈니 버전은 좀 다르긴 하지만 두 돼지를 잡아먹고 셋째 돼지까지 잡아먹으려는 늑대를 막내 돼지는 끓는 물에 빠뜨려 잡아먹는다. 권선징악이자 먹고 먹히는 이야기다. 사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와 <빨간 벽돌>은 별다른 연관이 없다. 아마도 영화의 제목에서 셋째 돼지의 지혜와 생존전략의 도구인 벽돌이 연상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제 감독은 빨간 벽돌의 제목이 구로동맹파업 당시 구로공단을 둘러싼 벽이 붉은 벽돌임에 착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시작하는 것은 연상 작용으로 비롯된 ‘의도적 오독’으로, 민중의 지혜와 생존전략을 담은 두 이야기를 벽돌로 이어내면서 둘의 비교를 통해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롭고도 반가운 징후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우화적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빨간 벽돌>은 크게 두 축으로 아니 세 축으로 풀어볼 수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지금은 중년이 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시 구로동맹파업 언니들의 나이인 청년들의 인터뷰이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요청하는 감독이 존재한다. 큰 얼개로만 얼핏 보면, 구로동맹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세대별 시선과 태도를 다루는 것 같지만, 영화는 예상과 달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부지런히 집을 지었고, 짓고 있는 아기 돼지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기돼지 삼형제>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먼저, <빨간 벽돌>은 사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건보다 인물에 주목한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 사건을 중심으로 대상을 담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은폐된 혹은 왜곡된 과거사를 다룰 경우,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물은 당시 사건을 체화한 증거이자 증언자로 소환된다. 최근에는 사건의 공간 자체에 주목하면서 공간에 내재되고 축적된 기억과 감응을 전면화한 영화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인물은 부재하거나 전면화되지 않는다. 행동과 사건 중심 혹은 공간 중심의 이야기 구성에서 <빨간 벽돌>은 오늘을 살아가는 진행형의 인물에 주목한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여분 동안 인물들의 일상을 나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솔 내음과 바람의 촉감을 느끼는 등산의 즐거움에 대해, 시어머니 병간호로 분주하고 힘들었던 마음에 대해, 나이 들수록 내면과 대화를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는 말을 통해 인물들의 오늘을 공유하고 동시에 낯가림을 풀어간다. 인물과 관계 맺기의 여정을 영화로 전반부 긴 시간 녹여낸 것이다. 참으로 낯가림 심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요 화두인 대상과 관계 맺음을 영화의 구조 속에 과감하게 기입한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속내를 나누기까지 필요한 시간들을 영화 속에 기입한 것이다.

관계 맺음의 과정은 청년들과의 만남에도 같이 적용된다. 주어진 장소를 찾아오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시작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를 말하는 감독의 모습이 삽입되면서 영화는 청년의 축이 시작된다. 다만, 중년의 언니들은 흘러가는 이미지(버스, 지하철, 자동차)를 따라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식인 반면, 청년들은 세팅된 장소에서 감독이 무엇인가 요청하고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다. 여기에 바로, 두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의 위치와 태도가 담겨져 있다. 윗세대는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음 세대는 자리를 마련해 말 걸기를 시도하는 그 가교 역할이자 그 자리에 놓인 감독. 그러나 아무래도 감독은 윗세대가 조금 더 편한 모양이다. 중년 여성들의 말은 경청하고 맞장구를 치며 함께한다면, 청년들의 말은 요청되고 세팅되고 종종 유리벽 밖에서 그들을 담는다. 생략되어짐과 동시에 논의의 과정을 비춰내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청년들에게 정리해고 대상을 가려내라는 가상의 ‘나쁜 질문’을 던질 때, 감독은 386 세대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쁜 질문을 받고 싸웠지만 결국 그 질문을 더 공고히 전달하고 심지어 다그치게 된 그 위치.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가장 불편하고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묘한 장면이다. 영화는 이처럼 두 그룹을 담아내는 동시에 두 그룹의 사이에 위치한 감독의 위치 혹은 역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간간히 파편적으로 틈입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삽입 이미지라고만 보기 힘들 정도로 힘이 있다. 신발, 빨래, 운전사의 명찰 목걸이, 창틀 거미줄, 재봉틀... 감독의 시선이 일상 속 사물에 가 닿은 방식으로 읽힌다. 영화는 감독을 포함해 인물들의 오늘이 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여 분 지나서야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조금씩 풀어낸다. 영화는 조용히 우리들의 크고 작은 선택을 소환한다. 화장실이 급한데 지하철에서 내릴까 말까? 자고 간 남친의 팬티를 빨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다시 온 남친을 가라고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영화는 간간히 웃음을 유도하면서 살면서 마주하는 선택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사실 숱한 선택을 해오면서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어떤 선택은 여러 선택지 중에 나의 자의로 선택한 것도 있고, 어떤 선택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강요된 방식의 선택도 있다. 그리고 고스톱을 치고 돌아온 새벽녘 강명자 씨의 말처럼 “나 자신에게 쪽팔리지 않으려는” 선택도 있다. 영화는 선택의 수많은 결과 그 선택의 저변에 놓인 마음들을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에 대해 다가간다. 구로동맹파업의 참가자들 더 나아가 수많은 민중항쟁과 오늘의 촛불 시위까지 “선택”으로 풀어낸다. 사건에 결박당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선택한 사건과 경험에 대하여. 그래서 영화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던”, “구로공단에 언발란스 머리를 퍼뜨린 패션 감각”에 대하여, “넝쿨장미가 어우러진 공장 벽이 너무 예뻤던”, “기를 쓰고 벗어나려던 공장을 대학생이 공장에 들어왔다는 말에 받았던 충격”을, “50장을 하고 5장을 숨기던” 기억을 오롯이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빨간 벽돌>은 늑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늑대의 악행이 말되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늑대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악행에 대해 말을 하도록 묻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아기돼지의 일상과 기억을 공유하고 듣는다. 사실 늑대의 악행은 잘못된 사건과 문제를 고발하고 폭로할 때는 적절하고 유효하지만, 아기돼지의 입으로 악행을 말하게 되면 아기돼지는 사건에 결박당한 힘없는 피해자로 강제되어 버린다. “피해자의 피해자화”를 구축하게 된다고 할까. 영화는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만행을 고발해 늑대의 피해자로 가두는 대신 아기돼지가 어떻게 벽돌을 선택했는지, 벽돌을 쌓아나갔는지, 지금도 열심히 쌓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피해자 서사의 프레임을 벗어버린 것이다. 우화 <아기돼지 삼형제> 역시 아기돼지를 피해자로만 가두지 않고 아기돼지의 지혜와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화는 결국 먹히거나 먹는 것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끝이 난다. 얼핏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먹느냐 먹히는 구도 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시스템이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가해자화 서사”는 우리 시대의 “나쁜 프레임” 중 하나이다. 피해자/가해자 서사 혹은 가해자화 서사는 결국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진흙탕 싸움을 유도하는 프레임이다. <빨간 벽돌>은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걸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버틀러식 용어를 빌면, “박탈당한 주체”로서 우리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박탈당했기 때문에 박탈당할 수 있는 것” 여기서 박탈은 자족성을 한계짓는 용어이자 우리를 관계적이고도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확정 짓는 양가적 가치를 가진다. 영화는 사건을 겪은 혹은 겪어낸 인물들을 사건에 결박하기보다는 사건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속박하기도 하고 동시에 구성하기도 한 자율적 존재로 풀어낸다. 사람이 보이는 영화 <빨간 벽돌>은 우리 모두 유죄라는 집단적 대속 행위나 피해자에게 애도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사를 소환하고 기억하게 하되, 이를 통해 일상이 품은 정치적 수행의 가능성을 조용히 풀어낸 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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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1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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