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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키들랏 타히믹,2015)

글: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 2017-01-09  

게시판 상세내용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 영화란 무엇일까?

다시 1년이 지나갔다.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영화는 자꾸 숨 막히는 현실의 탈출구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꼭 봐야 할 영화가 되었고, 꼭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영화로 호명되었다. 비루한 현실은 그렇게 영화를 프로파간다化 했다. 우리는 그런 영화들로 위안을 얻었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영화 속 현실이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라는 걸,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며 모두가 분노하고 허탈해했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말과 이미지 속에서 기대와 불안으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최근 몇 년간 극장에서 개봉하고,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본 우리들은 한 영화를 두고 치열한 논쟁하지도 않았고,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게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들 때문이었을까? 문득,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던 건 그 때문이었다.


. 올해의 리스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2016년 한해 본 영화들의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베를린 영화제에 다녀와서 그 결과가 리스트에 반영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뽑아보니 생각보다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먼저 영화를 보는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준, 그리고 장르 안에서 예측을 깨뜨리며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 영화 두 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비거 스플래쉬>와 폴 버호벤의 <엘르>. 특히 <엘르>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아니 내가 가지고 있던 강간의 신화를 해머로 내리치듯 깡그리 부숴버리고, 오랜만에 영화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가 호평을 받았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완벽하진 않아도 기존의 제작 시스템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중한 결과물이라는 걸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더 반가웠던 영화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라브 디아즈, 그는 이제 어떤 경지에 도달한,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재 진행형이면서 전진하는 작가라는 걸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미셸 프랑코의 <크로닉>,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를 계속 전진시키는 파격적인 엔딩은 현대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고, <다가오는 것들>을 보면서는 미아 한센 러브의 전진하는 보폭이 커서 이 감독의 차기작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장편 <자이언츠>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상영작에서 이 감독의 이름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던 보울리 레너스의 네 번째 장편영화 <더 퍼스트, 더 라스트>. 난 그가 연기한 영화보다 연출한 영화가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두 편. 먼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잔 프란코 로시의 <화염의 바다>,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이탈리아 시골의 한 가정과 이탈리아에 유입된 난민들의 행렬을 대비시킨 이 다큐멘터리는 축이 되는 두 이야기의 교차 지점의 인과관계가 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 년 내내 마음 한 켠에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작업과 사회운동이 밀착되어 있거나, 대상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한 최근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서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를 지켜내려는 두 감독의 의지로 완성되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다시 확장시킨 소중한 결과물, 김일란, 이혁상<공동정범>.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들랏 타히믹의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이 영화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MMCA필름앤비디오의 기획 프로그램 <이야기의 재건>의 첫 번째 시리즈와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해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 공개된 바 있는데, 올해에는 사사로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까 한다.


. 키들랏 타히믹 - 고요한 번개.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일만 불의 제작비로 만든 데뷔작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창립자이자 당시 포럼 디렉터였던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극적으로 발굴되어 상영된 후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화사에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아시아 영화감독 중 한 명이며,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아시아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필리핀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이다.

1912년 필리핀 바기오 시에서 출생한 키들랏 타히믹은 필리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위치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OECD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뮌헨의 예술가 공동체에서 잠시 지내다가 베르너 헤어토크를 만나 그의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의 배우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초기에 만든 세 편의 영화는 - <향기어린 악몽>(1977),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1979), <투룸바>(1983) - 은 그를 후기 식민주의 제3세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세 영화는, 말하자면 트랜스내셔널 시네마 Transnational Cinema에 속하는데, 사실 영화 이론 쪽에서 이런 개념이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지금보다 훨씬 덜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적 세계화 Globalization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기록한 영화사의 첫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자신의 이론에 그의 영화를 끌어들인 것도, 수잔 손탁과 오에 겐자부로로부터 환대받은 이유도,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는 세 번째 영화 <투룸바>(1983)를 완성한 후 필리핀 토착민들과 함께 살면서 주로 필리핀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에 대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비디오 에세이 형식의 영화들을 주로 제작해왔다. 요요, 쌀, 지붕, 바학, 가족의 가치, 필리핀의 역사들을 소재로 한 그의 영화들은 필리핀의 역사와 필리핀 고유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분명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영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선형적인 내러티브 대신 가지가 뻗어 나가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절대로 유머를 잃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와 실험영화 사이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의 영화는 ‘고요한 번개’라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대로, 고요하면서 날카롭고 지적이면서 유쾌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꼿꼿이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키들랏 타히믹과 그의 영화들은 많은 필리핀 감독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젊은 감독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그 영향력은 브리얀테 멘도사와 제프리 제투리안의 사회적 리얼리즘부터 존 토레스와 라야 마틴의 개인적 에세이, 라브 디아즈와 카븐 데 라 크루스,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의 영화적 실험에까지 이른다. 특히 자신만의 형식과 스타일로 필리핀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전진해온 라브 디아즈는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와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되어 호평을 받은 그의 최신작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은 1980년에 촬영을 시작하여 30여 년이 지난 2010년에 미완성된 채 공개된 33분짜리 단편영화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의 두 번째 확장판이자 첫 완결판이다. 키들랏 감독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인물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노예였던 믈라카 Melaka 출신의 엔리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단편영화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이 야심 찬 시도는 한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2010년 이후 이미 1차로 완성된 33분 분량의 단편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감독이 살고 있는 1천 5백 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바기오시 이푸가오족 마을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뒤섞고 편집하여 140분 분량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완성했다.

그의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촬영하고 편집한 후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존의 영화제작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관심 있는 대상을 촬영한 후 모아두었다가, 이야기가 떠오르면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기존의 영상들을 배치하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투룸바> 이후의 그의 모든 영화들은 계획에 따라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콜렉팅’ 한다는 점에서 현대 디지털 영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또한 자본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제작기한을 정해두지 않으며, 돈이 없으면 작업을 중단하고, 돈이 생기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기름 한 컵 영화 만들기’라고 불리는 이런 독특한 영화 제작 방식 때문에 그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간을 일정하지 않다. 이처럼 가장 독립적인 영화제작방식으로 평가받는 그의 영화제작방식은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약 1시간 40분 정도 분량의 전반부는 구조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하나는 화자가 과거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마젤란의 노예 엔리케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마젤란과의 세계 일주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에서 엔리케의 후예로 보이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후 사라진 노인을 쫓던 젊은이가 결국 노인과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고 노인을 찾던 젊은이는 결국 노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젊은이의 이름은 엔리케이고, 노인의 이름은 페르난디드 마젤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미 한 편의 완결된 영화이기도 한 전반부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이야기꾼이고, 자신만의 영화제작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떻게 진화시켜 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감독 스스로 ‘디렉터스컷’이라고 부르는 약 40분 분량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대한 해설서이자, 감독이 평생에 걸쳐 필리핀인으로 추정되는 엔리케의 삶을 통해 탐구해온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철학서이자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천해온 철학적 방법론은 주로 후반부를 통해 다루어진다. 특히 키들랏 감독은 ‘제3세계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하는데, 감독이 직접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가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아의 “언어는 제국의 가장 완벽한 무기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상징적인 시퀀스는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한 통찰과 함께 탈식민주의의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장난기 많은 동네 할아버지 같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날카롭고 유쾌한 통찰이 다시 한번 번뜩이는 순간이다.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은 이렇게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발릭바얀#1’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대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 속에 있었던 한 아시아 출신의 첫 외국인 노동자 엔리케의 여정을 통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편 현재 시점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전통과 순환의 문제를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식민주의 시대의 기억을 호출하여, 아시아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해 온 35년간의 실천적 과정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유쾌하게 엮어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약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떠나기 전, 다음 해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 중 한 명으로 키들랏 타히믹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5천만 원의 제작비가 주어졌다면, 그는 <과잉개발의 기억>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는, 올해로 75세가 된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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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2015 | 140분
감독 : 키들랏 타히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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