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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판 위의 여인 (구로사와 기요시,2016)

글:정한석(영화평론가) / 2017-01-02  

게시판 상세내용

은판 위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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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는 걸작을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명장면을 만드는 감독이다. 물론 이건 다소 과잉된 진술이다. 하지만 <은판위의 여인>을 보고 나면 과도함을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했고 기요시의 작품들 중에서는 하위에 속할 만한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조차 몇몇의 밀도 높은 명장면을 보유한다. 특히 살인마가 피해자들을 가둬 놓은 감금실 장면은 보는 이의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한다. 분위기와 결이 현격하게 다르지만 <은판위의 여인>에는 명장면들이 훨씬 더 많고 무엇보다도 이 점이 이 영화의 마력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부정확하거나 싱거운 표현이 될 것 같다. <은판 위의 여인>은 명장면들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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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다음은 해당 장면들에 관련된 몇 가지 메모다. 하지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미개봉작이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최소한이나마 정리해야한다는 필요를 느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식으로 쓰고 싶어졌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걸맞게 사사로운 형식으로 써보는 것이 좋겠다고 구실로 삼았다. 영화를 보고 떠올린 단상 몇 가지를 거칠지만 짧게 적었다. <은판위의 여인>을 관람한 이들에게는 해당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소 난감하더라도 도리어 이 영화의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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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카메라는 왜 저렇게 큰 것일까. 실제로 저렇게 큰 카메라가 있었다는 말일까. 있다고 해도 저 대형 카메라의 존재는 내게 지금, 실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스테판(올리비에 구르메)의 사진 작업 조수로 온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장(타하르 라힘)조차 스테판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이게 뭔가요?”라고. 스테판은 무뚝뚝하게 말해준다. “카메라야”라고. 그러니 이것은 촬영 장비에 관한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을 법한 사진 조수조차도 못 알아보는 카메라가 아닌가. 영화 속 스테판의 대형 카메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스테판은 19세기 은판 사진술인 ‘다게로타입’을 현대에 와서도 고수하는 사진작가다. 그런데 그의 카메라의 몸체는 성인 남자 키에 맞먹을 정도로 높고 길이는 훨씬 더 길다. 이런 카메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했는지) 아닌지, 그 실존 유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나는 이 비상식적으로 큰 카메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 크기 때문이고, 크기 때문에 강조된 형상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화에 음산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건 대저택이라는 흔한 공포영화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 구형의 대형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카메라라고 말했지만 이건 카메라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차라리 괴수(괴물)가 아닐까. 기요시는 구식으로 오랫동안 찍어야 하는 은판 사진술과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유사성을 시사했는데,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괜찮다. 이 카메라가 외눈박이에 주글주글한 검은 거죽의 형상을 지닌 대형 괴수처럼 느껴진다는 게 더 중요하다. 스테판은 이 괴수-카메라 앞에 딸 마리(콘스탄스 루소)를 모델로 세워 자신의 예술을 실현한다. 스테판이 마리의 몸을 고정기에 묶고(그 고정기란 중세 시대의 고문 기계를 또한 연상시킨다) 장시간 노출로 사진을 찍을 때, 마치 괴수가 재물의 육체와 영혼을 서서히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나의 상상이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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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이었던가. 이상하게 기억이 명확하질 않다. 아버지가 실수로 밀었던가. 마리가 실수로 미끄러졌던가. 이유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기요시의 영화답게 사건은 화면 바깥에서 벌어지고 그 사건의 결과는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카메라는 계단을 정면으로 잡고 있다. 그런 뒤에 계단 주위를 천천히 얼마간 가로 지르며 서성인다. 이 카메라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해질 무렵, 갑자기 와르르 무언가 쏟아져 내린다. 마리의 몸이 계단을 따라 굴러 내려온다. 화면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쏟아지듯이 혹은 던져지듯이 추락한다. 기요시는 이 장면에서 드라마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 그 추락의 급작스러운 물리적인 충격이 더 강력하다. 물론 이 상황은 기요시의 다른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도쿄소나타>에서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이층에서 혼내고 있었고 카메라는 1층에 있었다. 그 때 계단을 따라 어린 아들의 몸이 갑자기 거꾸로 추락한다. 하지만 <은판 위의 여인>에 이르러서야 계단-추락의 장면은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이것과 유사한, 즉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내리 꽂히는 기요시의 운동적 충격은 여러 영화에 다양하게 배치, 전개되어 왔을 것이다. 예컨대 <회로>를 다시 보다가 이런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다. 허공, 즉 프레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수직강하 하면서 한 남자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붉은 옷의 유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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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시가 갑작스런 물리적 충격 뿐 아니라 은근한 심리적 표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장과 마리가 함께 살기로 한 뒤의 일이다. 하지만 마리가 사람인지 유령인지 장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관객은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는 없다. 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강가의 수색 작업을 목격하고는 그곳에서 서성거린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마리의 시체가 떠오르지나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때다. 물속에서 서서히 잠수부가 떠오른다. 마리의 시체 대신 혹은 그 누구의 시체 대신 잠수부의 떠오른 상체를 장은 잠시 공허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에는 사실상 아무런 설명이 없다. 물속에서 떠오른 잠수부와 그를 바라보는 장의 시선 밖에는 없다. 그 둘 사이의 뚜렷한 관계도 없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며 심리적 목소리가 만연하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녀가 혹시 유령은 아닌가 하는 장의 두려운 심리를 이 장면은 간결하고도 특별하게 외재화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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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마리가 떠나고 스테판은 혼자 남겨진다. 아니 사실은 죽은 아내의 유령과 둘이 남겨진다. 그리고는 그가 화원에 머무를 때 아내-유령이 마침내 스테판을 덮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의 기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요시 영화의 유령의 형상과 운동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명확하고 빠르기도 하고 흐리고 왜곡되고 느리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령(성)은 처음 본 것 같다. 이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괴이한 정지 쇼트들이 몇 개 연이어졌던 것 같고 아내-유령은 각 쇼트마다 정지된 포즈로 박혀있었던 것 같다. 정지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 정지된 채 팔을 뻗은 그녀의 몸,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스테판에게 달려든다. 그 때 이런 질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왜 그녀의 모든 몸짓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아내-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는, 아내-유령이라는 사진들이 달려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 사진이 달려든다는 인상이 더 확실하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 유령의 형상은 마치 빛 번짐 현상이 일어나 망쳐진 사진 혹은 하얗게 화이트 아웃 되어 버린 사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스테판의 사진술 혹은 재현에의 집착이 낳은 부작용이 이런 유령의 형상과 운동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우린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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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이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면 장은 마리-유령 이라는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아침인 것 같다. 장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런데 곁에는 있어야 할 마리가 없다. 장이 시선을 돌리면 카메라는 서서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하고 방의 저 구석 문 뒤에 마리가 하얀 속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 간단한 패닝은 간단한데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우아함과 불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것이 <회로>에서 시도되었던 한 장면을 질적으로 집중 도약시켜 이뤄낸 장면이라는 것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유령과 벽이라는 기요시 영화의 유령성에 대한 우아한 터치임은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느꼈던 것 같다. 기요시의 유령들은 종종 벽에서 출현하여 벽으로 사라져간다. 그 벽에 마리가 몸을 바짝 붙이고 얼어붙은 채로 서 있을 때 거기에서는 기이한 슬픔이 느껴진다. 화면 바깥의 저 비가시적 무언가에 이르는 그 힘의 방향과 세기가 우아하고 불길하다. 혹은 장의 두려움과 의심의 지점으로부터 마리의 불안정하면서도 위축된 몸이라는 지점으로 공기를 몰아가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해가는 카메라의 그 움직임이 일으키는 힘의 방향과 세기만으로도 이 장면은 더 없이 아름답다. 이런 장면은 쉬운 것 같지만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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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 <은판위의 여인>은 기요시 영화의 명장면들 모음집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재활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제약된 조건 때문에 시도는 했으나 집중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금 여기서 마음껏 힘주어 세공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최근의 기요시는 인간과 유령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유령의 공존의 세상을 자주 그린다. 그럼에도 대립의 세계에서 공포를 극화할 때 사용했던 미학을 이 공존의 장 안에서도 재등장시킨다. 공존이라는 주제와 공포를 극화했던 미학적 효과 사이에 원활한 접점이 찾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실은 기요시의 길에 대해서는 언제나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는 차라리 그의 영화 <회로>의 그 유명한 유령처럼 멈추지 않고 걸을 뿐이다.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한 번 크게 휘청 거려 넘어질 뻔 하다가도 또 다시 일어나 걸으면서 끈질기게 영화를 만든다. 때문에 그에게는 걸작의 행진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필모그래피가 휘청거린다 해도 각 영화에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은판위의 여인>은 가장 중요한 일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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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판 위의 여인

은판 위의 여인  Daguerreotype
2016 | 130분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각본 : 구로사와 기요시,Catherine Paille,Eleonore Mahmoudian
출연 : 타하 라힘, 올리비에르 구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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