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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의 기타큐슈 삼부작 <헬프리스>(1996), <유레카>(2000), <새드 배케이션>(2007) (아오야마 신지,2007)

글: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조지훈) /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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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의 기타큐슈 삼부작 <헬프리스>(1996), <유레카>(2000), <새드 배케이션>(2007)

한 해 동안 보았던 영화들을 정리한 리스트를 뒤적여 본다. 이 리스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있다. 때론 내 머리를 움직였고, 때론 내 마음을 움직였고, 때론 다신 거들떠보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했고, 때론 중간에 영화 보기를 포기했던, 한 해 동안 나를 거쳐 간 모든 영화들이 그곳에 있다. 그중에서 올해 나를 흔들어 놓은, 그래서 몸에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24편의 영화를 추려냈다. 그리고 이 리스트는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이므로 지극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총 13편의 영화를 추려냈다.

먼저 한국영화 4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흥미롭기 짝이 없는 동어의 변주가 여전히 전진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위로공단>은 영화의 구조와 내러티브를 쌓아가는 방식에 있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하나의 사례였으며,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매년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학(원)의 졸업 작품들이 한국의 중요한 독립 극영화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해진 현실 속에서, 지도교수의 멘토링과 자본의 시스템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리고 올해 본 단편영화 중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클린 미>는 이미지의 커팅과 편집, 리듬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적어도 내러티브 중심의 학교 단편영화들이 대부분인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재능의 발견이었다.

해외 다큐멘터리 3편. <액트 오브 킬링>이 폭력의 전시를 통한 극단적 자극,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해 냈는가와 다큐멘터리의 윤리를 고민하게 했다면, <침묵의 시선>이 포착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미세한 표정은 머리의 방해 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시티즌포>는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생 일대의 대상을 앞에 두고 감독이 취한 태도, 소재가 가진 정보와 개인의 정조를 함께 담아내는 방식이 흥미로웠으며, 캐브랑리 박물관이 제작한 민족지 영화 제작 프로젝트 <세계의 노정> 시리즈 중 한 편인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북녘의 빛>은 영화 미학과 민족지 영화의 경계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 수작이었다.

그리고 3편의 해외 극영화.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나가고 있는 아시아의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라브 디아즈의 <노르테, 역사가 끝나는 곳>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걸작이었다. 그리고 신인의 굴레를 벗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유럽의 젊은 감독 중 요하킴 트리에, 조아킴 라포스와 함께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루벤 외스트룬트의 <포스 마쥬어: 화이트 배케이션>은 감독에 대한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으며,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종이달>을 보고 나서는 최근 몇 년간 비어있던 주목할 만한 일본 감독 리스트에 마츠나가 다이시와 함께 요시다 다이하치라는 이름을 적어두었다.

이렇게 10편을 다 채운 나의 사사로운 리스트의 마지막에 특별하게 추가한 영화는 바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기타큐슈 삼부작 - <헬프리스>(1996), <유레카>(2000), <새드 배케이션>(2007) - 이다. 전북독립영화협회가 기획한 ‘아시아 영화 특별전’을 통해 이 세 편의 영화를 다시 만난 것은 올해 많은 영화들을 만나며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이 삼부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기타큐슈 삼부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 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쓰비시가 미국의 상징이었던 록펠러 센터를 사들이고,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던 일본 버블 경제의 절정기였던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 신성불가침의 살아있는 신이었고 패전과 동시에 인간 선언을 하고 전쟁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후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있던 천황의 죽음은 일본 사회 전체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고,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일본 국민들은 정신적 공동空洞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일본 젊은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전쟁을 일으켰던 아버지 세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 경제는 거짓말처럼 거품이 꺼졌고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 시대에 돌입했다. 기업들은 경영 규모를 축소했고, 실업률은 증가했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허우적대던 일본은 1995년, 일본 사회 전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2개의 사건을 연달아 경험한다. 1995년 1월 17일에는 무려 6,300여 명의 사망자와 2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발생시킨 ‘고베대지진’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약 2달 후인 3월 20일에는 ‘옴진리교 가스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동경의 관청 밀집지역인 가스미가세키 역의 5개 전동차 안에 옴진리교 신도들이 살포한 사린 가스는 5,500여 명의 시민을 입원시켰고, 1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0년대 일본 젊은이들은 천황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공동화空洞化 현상과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 속에서 전쟁의 상흔과 빚만 남긴 아버지 세대에 분노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끔찍한 테러사건을 경험한 후에는 평온하고 안전해야 할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무력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헬프리스>(1996)

1996년에 공개된 아오야마 신지의 데뷔작이자 기타큐슈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헬프리스>는 이런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야스오(미츠이시 겐)는 자신을 감옥에 보내고 죽어버린 보스를 만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켄지(아사노 타다노부)는 그럭저럭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보며 살다가 아버지의 자살 후 갑작스레 살인을 저지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야스오의 연쇄 살인과 아버지의 자살을 전해 들은 켄지의 폭주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채 죽어버린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헬프리스>는 전후 세대가 일본 사회에 남긴 상흔 속에서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분노로 파멸해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이며 천황의 죽음으로 인해 분명해진 아버지 세대에 대한 당시 일본 젊은 세대의 무의식을 탐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유레카>(2000)

그로부터 4년 후인 2000년에 완성된 <유레카>는 옴진리교 가스 테러사건이 일본 사회에 남긴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룬다. 가스 테러사건은 평화로운 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버스 총기 인질사건으로 대체되었다. 이 영화는 버스 총기 인질사건의 세 명의 생존자(버스 운전기사 사와이와 나오키, 코즈에 남매)들이 서로 의지하며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내가 살아난 것이 잘못인가?”라고 내뱉는 사와이의 대사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3시간 27분에 달하는 길고 고통스러운 이 여정은 부조리한 일본 사회의 증거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삶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긴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말을 잃었던 코즈에가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한 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사와이가 “집에 가자”고 외치면, 우리는 “트라우마 이후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는 단순한 생존이나 고통의 해소가 아니라 삶에 최대한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것”1)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드 배케이션>(2007)

<헬프리스> 이후 10년 만에 완성된 기타큐수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새드 배케이션>은 <헬프리스>와 <유레카>의 후일담이며 전후 일본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무의식을 정리하고 그 모든 트라우마를 보듬어 안으려고 시도한 영화다. <헬프리스>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켄지와 <유케카>의 버스 테러사건에서 살아남은 여동생 코즈에가, 이미 <유레카>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혈연관계가 없는 수평적 대안 공동체’에 해당하는 마미야 운송회사에 도착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친부-친자 관계를 극복하는 양부-양자 관계와 친모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던 양자가 양부의 친자를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혈연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버지 세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한편, 대안적 공동체인 마미야 운송회사와 수평적 유사가족을 돌보는 켄지의 친모 치요코를 통해 일본 사회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희망 속에서 이 삼부작을 마무리한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켄지나 코즈에 또는 치요코가 아니라 세 편의 영화에 하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단 한 명의 인물인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이다. <헬프리스>에서는 자신을 괴롭힌 동창들을 살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켄지의 친구이자 야스오와 켄지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였고, <유레카>에서는 버스 총기 인질사건으로 버려진 남매를 찾아온 유일한 혈육이자 사와이와 남매의 버스 여행에 동참했던 유일한 이방인이었으며,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코즈에 수색대에 합류하여 결국 코즈에와 재회하면서 모든 상황을 객관적인 자리에서 바라본 유일한 관찰자였던 아키히코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서 세 영화의 모든 사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는 정확히 관객의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아키히코의 시선과 10년에 걸친 그의 성장과 변화는 <헬프리스>로 시작하여 <유레카>를 거쳐 <새드 배케이션>에 도착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오야마 감독의 변화와 맞닿아 있으며, <새드 배케이션>이 제시한 희망의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각각의 완결성을 가진 세 편의 장편 영화인 동시에 세 편이 하나의 주제로 엮여있는 거대한 옴니버스 영화이기도 한 기타큐슈 삼부작은 아오야마 감독이 10년에 걸쳐 일본의 근현대사의 이면에 깔린 일본 사회의 무의식과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탐구하여 이를 영화에 담아내려고 했던 야심 찬 도전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시도가 과연 성공적이었는가는 <새드 배케이션>이 내포하고 있는 다층적인 메시지와 <새드 배케이션>이 제시한 해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우리 안의 낯선 타자이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워버렸지만 결국엔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짓는 타자의 흔적들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진정으로 타자와 분리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2) 라는 말을 영화로 실천한 아오야마 신지의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반드시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이 세 편의 영화가 한국의 관객과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1) 「트라우마 이후의 삶」 (맹정현 저, 책담) 中
2) 「트라우마 이후의 삶」 (맹정현 저, 책담) 출판사 리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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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1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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