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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평화 (이경화,이지윤,한병아,야마다 코지,최한이,김연정,김은혜,2017)

글:나호원(애니메이션 평론가) /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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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평화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전에는 평화로웠습니다
조카들은 톰과 제리를 보았습니다
남동생 내외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연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조금만 늙으셨습니다”


시인은 시를 썼고,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시인은 몇 해 전, 애니메이터들이 꾸리는 영화제에서 심사를 했다. 건조하고 위엄있는 판결문 같은 심사평 대신, 시인은 감성을 촉촉이 담아 선정의 변을 들려주었다. 문장을 읽어내는 시인의 목소리는 낭송의 울림 그대로 잔잔히 스며들었다. 해당작 <디스크 조각모음> (황보새별, 2014)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지만, 내게는 시인이 읊조리던 단어와 음색과 표정과 체온이 고스란히 늘 함께 떠오른다. 아마도 그 시간, 그곳에 함께 했던 많은 이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래서였을까, 애니메이터들은 여전히 시인을 잊지 않았고, 올해는 그가 쓴 시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였다. 시인이 다수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하나의 수상작을 골랐듯이, 이번에는 애니메이터들이 이미 발표된 시인의 시 속에서 하나를 찾아낸 셈이다. 시인은 기꺼이 그 시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서 오디오 트랙으로 건넸고, 애니메이터들은 목소리 속에 담긴 시를 이미지로 풀어내고자 했다. <휴일의 평화>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후 또한 평화롭습니다
둘째 조카가 큰 아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묻는 걸 보니 이제 이혼을 아나봅니다
첫째 조카가 아버지 영정 앞에
조용히 서 있는 걸 보니 이제 죽음을 아나봅니다”


시인과 애니메이터의 ‘콜라보’인 <휴일의 평화>는 2017년 인디애니페스트 개막식에서 첫선을 보였다. 해마다 이 영화제는 ‘릴레이 애니메이션’라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꾸려왔다. 다수의 애니메이터가 참여하는 집단 창작의 형태이며, 이제껏 줄곧 ‘평화’를 주제로 삼았다. 물론 릴레이 애니메이션이 인디애니페스트만의 발명품이나 전유물은 아니다.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국제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러한 집단 창작은 기획되고 시도되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대체로 은둔형 창작을 지향하는 소박한 애니메이터들의 성향을 고려하건대, 릴레이 애니메이션은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저마다 장난기 한 보따리씩은 지닌) 애니메이션 종족의 성대한 의례와도 같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주정거장을 짓는 엄청난 프로젝트는 아니다. 릴레이라는 말뜻 그대로, 앞선 작업자의 마지막 프레임 이미지을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영상을 자유로이 펼쳐내고는 마지막 프레임의 장면을 그다음 작업자에게 넘기는 식이다. 모든 것을 이어 붙이기 전까지는 누구도 최종 결과물을 가늠할 수 없다. 이렇게 애니메이터들은 자신들의 영화제를 즐겨왔다. 인디애니페스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릴레이라는 형식은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분업 시스템 (1920년대, 이러한 제작 공정은 포드 자동차 공장 이상으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배했다)을 뒤집어엎는, 애니메이션다운 유쾌한 전복의 기획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입니다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허공이라면 뛰어내리고 싶고
구름이라면 뛰어오르고 싶습니다”


심보선 시인의 시 <휴일의 평화>는 화려하지도, 애써 심오해 보이려 하지 않다. 그저 담담히 때론 독백으로, 때론 흘려 말하는 고백처럼 ‘어느 보통의 휴일’을 읊조린다. (애니메이터들이 그 시에 눈이 간 이유가 <톰과 제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휴일 오전의 활력은 <톰과 제리>와 제법 잘 어울린다).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이 저마다의 몫으로 시를 나누어 접근하면서, 시는 활자 속에 품어두었던 섬세한 결을 비로소 드러낸다. 처음 <휴일의 평화>를 읽을 때, 거기에는 그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평화’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러 번 되뇔수록, 평화로운 풍경 밑에는 긴장의 에너지가 한껏 농축되어 깔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라는 소망처럼, 휴일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주 조금만 늙으셨다”는 오전처럼, 삶의 시간은 서서히 흘러간다.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삶의 속도는 바로 애니메이터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속도와 다름없다. 미세한 결, 틈, 마디는 릴레이라는 형식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각각의 창작자는 자신마다의 프리즘으로 하나의 풍경 속에 감춰진 다양한 색을 분리시켜 스펙트럼으로 펼쳐놓았다. <휴일의 평화>라는 시는 애니메이션으로 제 모습을 마주한 셈이다.

시 속에는 가족을 이루는 여러 인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면서 ‘휴일, 그곳’에서 모여 있다.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은 각자의 스타일과 감수성으로 ‘휴일, 그곳’을 시각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는 담백한 스케치로, 누군가는 추상적 움직임으로, 누군가는 내면의 침잠으로, 누군가는 경쾌한 운동으로 말이다. 마치 시를 이루는 시어들 하나하나가 각각의 농도와 밀도를 지니듯이...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휴일은 그렇게 잠시 잠깐 균형의 순간으로 우리 앞에 머물다 사라지게 마련이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날은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족이 모처럼 모였을 때, 마냥 평화롭지는 않다. 누군가의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면 그 상황을 채우는 숨소리마저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듯싶지만, 그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단단하게 결합된 전체의 통일성이란 불가능하다. 시어는 자유로이 떠돌며 매 순간 읽는 이의 감흥에 따라 새롭게 조직되기 마련이다. 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집단 창작 속에서 시는 결코 일관된 전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각자는 시의 일부분을 자기식으로 이해했고, 휴일 어느 날의 시간대를 채웠으며, 그곳을 교차하는 시선 중 하나만을 따랐다. 그럼에도 (혹은 그러하기에) <휴일의 평화>는 이번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상영된 가장 뛰어난 성취로 꼽힐 자격이 있다. 영화제 개막식의 구색을 애써 꾸리는 요식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독립된 가치를 지니는 창작품 자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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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평화

휴일의 평화  The Peaceful Holiday
2017 | 5분
감독 : 이경화,이지윤,한병아,야마다 코지,최한이,김연정,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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