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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전기 (야스히코 요시카즈,1989)

글:박수민(영화감독) /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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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전기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아니 반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원형을 떠올리고, 옛것이 훨씬 더 훌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증거일 테다. 지금 애니메이션 칼럼을 쓰고 있지만 민망하게도, 현대 애니메이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탓에 늘 먼지 쌓인 추억의 라이브러리만 뒤지는 자괴감의 변명이다.

내게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아니메’는 언제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왔던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모든 개념과 인식의 근간이다. 그 시절의 작품들을 접했던 때의 내가 이형(異形)의 이국(異國) 문화에 심취했던 10대였기 때문이겠지만,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선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꼈던 이유가 있다. 그 시절 아니메는 뭐랄까, 약간 미친 것 같았다. 작품이 다루는 소재와 전하는 테마 이전에 움직이는 그림 자체가 호화찬란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저마다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였다고 기억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한 번 대충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1984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린 민메이가 부르는 노래로 이 리스트는 시작한다. 85년 린 타로의 <카무이의 검>이, 86년에 지브리가 설립되어 <천공의 성 라퓨타>가, 87년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요수도시> OVA와 가이낙스의 첫 작품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가 나왔고(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 극장판도 1987년이었다. 물론 이쪽은 1978년에 나온 TV 애니를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것이었지만), 이어서 88년에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극장판이 어떤 정점을 찍고 89년에 <파이브 스타 스토리>와 <마녀 배달부 키키>가 나온 다음 90년대로 진입한다.


<수병위인풍첩>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0년에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91년 <사일런트 뫼비우스>, 92년 <자이언트 로보>, 93년 <수병위인풍첩>과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94년 다카하타 이사오의 <헤이세이 폼포코 너구리 전쟁>… 이렇게 가다가 95년에 <메모리즈>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로 또 한 번 아니메 퀄리티의 정점을 찍은 다음, 1996년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그렇게 끝나면서 내가 알던 일본 아니메의 세계는 멸망, 자폭, 리셋, 포맷되었기에 이후의 사정은 어떻게 되건 말 건 아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내 뇌에서 자동으로 전개 가능한 아니메 연대기다. (이 리스트에서 ‘건담’ 시리즈를 뺀 건 건담은 아니메의 영역과는 따로 구별하여 논의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이념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 아니메의 퀄리티가 굉장했던 이유를 일본이 버블 경제의 호황기를 누릴 때여서 업계에 들어오는 자본이 넘쳤고, 시장의 수요가 폭발했으며, 온갖 다양한 기회를 잡느라 애니메이터들의 재능 역시 부글부글 끓어 넘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중에 실상을 알고 보니 아니었다. 그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정착되기 시작한 ‘제작위원회’ 방식은 실은 애니메이터들의 육체와 영혼을 뜯어먹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인력과 노동을 엄청나게 요구하니 애초에 제작비가 높다. 점점 상승하는 제작비 부담과 흥행 실패의 손실 부담을 덜기 위해, 여러 출자사의 공동 투자를 받고 이익은 투자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이 바로 제작위원회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컨소시엄을 이룬 이 임의 단체는 수익 정산이 끝나면 해산한다. 모여서 파이를 만들고, 뜯어 먹고, 헤어진다.

내가 업계의 스승으로부터 들은 말 중에 가장 무겁게, 또 무섭게 받아들인 문장은 “돈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돈은 언제나, 반드시 언젠가 그걸 받아 쓴 이에게 말을 하는 법이다. 이 세계에서 눈먼 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돈은 말을 한다. 지분을 쥔 스폰서들이 권리를 갖고 말을 하면, 제작진은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제작위원회 안에서 얼마나 그 말들이, 즉 창작에 대한 개입이 많았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배에 사공이 많으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다 안다. 이런 구조는 작품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고 사실 떨어져야 정상이다. 손실을 각오하고 투자하는 것과 달리 손실 자체를 미리 나눠놓은 것이 제작위원회다. 흥행에 성공해서 수익이 나더라도 실무 제작사 입장에선 인건비와 작업비를 충당하러 이미 돈을 받아 쓴 거라, 남는 건 없고 다만 망하지 않았으니 다음 일을 또 할 수 있다. 남는 건 작품뿐이다. 노동을 이어가기 위한 창작이라고 할까.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로 만들어진 그 시절 일본 아니메의 이면에는 이번 일을 끝내 작품 한 편을 만들었으니 또 다음 일로 넘어가는 애니메이터들의 고통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아니메의 퀄리티란 그림과 내용의 질이 그다지 균형적이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화가 압도적인 데 반하여 이야기는 별 감흥 없이 그저 그런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내가 제시한 리스트를 결코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 걸작 리스트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창작 행위의 그럴듯함, 예술가의 근사함은 여기 없다. 간혹 어딘가 뜻 모른 채 도달하는 기적이 일어날 뿐, 이미 영혼이 탈곡된 채로 엄청난 공력의 그림을 집요하게 그려대는 노동자들만이 존재했다.

<비너스 전기>(1989)를 다시 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환상적으로 움직이는 그림 뒤의 현실노동 말이다. 퍼스트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에서부터 당시 업계 최고의 실력이었으며 가장 잘 나가는 애니메이터였던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은 본인의 원작 만화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 작품 이후 애니메이터 은퇴를 선언하고 애니메이션 일에 손을 뗐다. (수십 년 후에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으로 복귀하긴 하지만) 그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정지한 연속 그림의 세계, 만화로 돌아갔다. 그 이유로 남의 작품들을 보고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말한 건 아무래도 위장 같다. 흥행 실패도 원인이 아니었을 거다. 선생의 평소 객관과 드높은 성품으로 보아 애초에 그딴 건 관심도 없었을 것 같다.

나는 그가 애니메이션을 관둔 이유를 이른바, ‘학을 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긴 하지만 계속할 이유가 그다지 없는 노동에서 불과 40대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림이야 집에서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자본에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 노동을 온전히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만화로 옮겼다. 선생은 만화 작업에 어시스턴트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빌 슈트 건담 디 오리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아들을 보조로 썼을 뿐이다.

<비너스 전기>는 지구의 식민지로 테라포밍된 미래 금성에서 ‘아프로디아’와 ‘이슈탈’ 두 세력이 충돌한 전란의 한가운데, 바이크 레이싱 게임 선수였던 ‘시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왕도의 개>나 <무지갯빛 트로츠키>같이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만화 쪽이 훨씬 흥미롭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시로 말고 반대 세력의 주인공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원작 만화의 내용만 궁금해진다. 감히 말하건대 이 애니메이션에서 볼 건 오직 그림밖에 없다. 그러나 그림이 환상적이다. <아키라>의 작화와 모션이야 굉장하지만 오토모 가쓰히로 특유의 그림체가 어딘가 싫었다면, 짐작해보라. <비너스 전기>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이 그린 아름다운 캐릭터들이 <아키라> 이상으로 움직여대니까.

시로와 일당들은 전쟁이야 어찌 되건 자신들의 경기장을 점령한 거대전차 ‘타코’가 싫다. 탱크를 경기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그들은 각자 한 손에 대전차 무기를 들고서 원 휠 바이크를 몰고 간다. 일본 아니메를 통틀어 베스트 시퀀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액션이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어른들의 “힘과 거짓을 보면 부아가 치미는”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대의가 죽일 뿐”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으면 언젠간 좋은 일도 있단 말이다!”라며 구하러 달려가는 어른도 있다. <비너스 전기>가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은 딱 이 정도가 전부다.

관객의 감정을 어딘가 도달시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위대한 장인이 한때의 업을 ‘때려치울’ 명분을 제공한 작품으로써 <비너스 전기>는 충분히 넘치는 가치가 있다. 아직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못한 나는, 최고의 대가가 때려치운 어느 노동 앞에서 부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재능조차 없는 나는 사실 이쪽 일을 진작 때려치워야 했지만, 아직 내세울 명분을 만들지 못했기에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또 그 시간이 지리멸렬했던 이유는, 실은 진짜 고통스런 노동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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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분
감독 : 야스히코 요시카즈
각본 : 사사모토 유이치,야스히코 요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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