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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완결

글:선정우(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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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완결

※ 이 글에서는 되도록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을 하지 않고자 신경 썼으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주의하기 바란다. 첫 단락 “‘세카이계’라는 용어”에는 <너의 이름은.> 관련 내용이 전혀 없고, 그다음 단락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너의 이름은.> 한국판 메인 포스터 / <너의 이름은.> 한국판 티저 포스터

■ ‘세카이계’라는 용어

일본에는 ‘세카이계(セカイ系)’라는 용어가 있다. ‘세카이(セカイ)’는 ‘세계(世界)’를 뜻하는 단어를 일본어의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이다. 일본에서 2000년대(00년대, 소위 ‘제로년대’라고 불린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오타쿠 문화에 관한 빈번한 논의의 와중에 자주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한국에도 번역판이 출간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포스트 에바의 오타쿠 역사」(마에지마 사토시 저/2010년 첫 출간, 2014년 문고판 출간, 2016년 한국 번역판 출간/주재명·김현아 번역)에서는, 이 용어의 정의가 불명확하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띤 작품을 느슨하게 가리킨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한다.
- 소녀만 싸우고 소년은 전장에서 배제된다.
- 사회에 대한 묘사가 없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그리고 그 대표작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 타카하시 신의 만화 <최종병기 그녀>, 아키야마 미즈히토의 라이트노벨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을 들었다.


<별의 목소리> <최종병기 그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하지만 매우 곤란하게도 이 ‘세카이계 대표작’ 세 작품은 세카이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별의 목소리>에서는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되지 않고, <최종병기 그녀>에서는 주인공 소년도 전쟁에 휘말리며,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에워싸고 있는 군대라는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나온다. 애초에 이 세 작품은 ‘세카이계’라는 말로 한데 묶어버리기에는 각기 너무나 다른 특징이 있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그래서 세카이계는, 일종의 유행어일 뿐 실체가 없는 용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1995년 TV 방영 이후 1990년대 일본 오타쿠 문화를 규정짓는 작품이 되어버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포스트; post)에 등장한, 어떤 하나의 흐름에 속한다고 일컬어져 온 작품들을 폭넓게 지칭하는 단어로 편리하게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략적인 경향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앞선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한 세 가지 요소이기도 하고, 혹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가 주도하여 기획한 비평 무크지 「미소녀게임의 임계점」에 정의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너와 나)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을 사이에 두지 않고 ‘세계의 위기’, ‘이 세상의 마지막’ 등과 같은 추상적인 거대한 문제와 직결하는 작품군.― 「미소녀게임의 임계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말하자면 배후에 어떤 명확한 (혹은 ‘명확해 보이는’) 세계관이나 설정이 처음부터 존재하거나, 적어도 제작 도중에 도입되었던 작품들, 즉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 고전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세카이계 작품은 ‘자의식’을 그려내는 부분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중간 24화까지는 ‘마치 어떤 숨겨진 설정이 있는 것처럼’ 고전적으로 스토리를 그려내는 듯 보였으나, TV판 마지막에 느닷없이 수수께끼를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등장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것만으로 완결된 것과도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에지마 사토시는 이렇게 비유했는데 정말 수긍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므로 인용해보겠다.

추리소설로 비유하면, 탐정이 갑자기 수수께끼 풀기를 내팽개치고 피해자의 멘탈 케어를 시작하더니 “밀실 트릭은 풀 수 없지만, 피해자가 건강해졌으니 됐죠?” 이렇게 말한 것과 같은 꼴이니, 폭풍같은 비난이 일어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말하자면 스토리 그 자체나 작품에 담긴 ‘설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주로 10대 소년)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는 ‘세카이계의 시조’로서 <신세기 에반게리온>만이 아니라 PC용 어덜트 게임인 ‘시즈쿠’, 라이트노벨인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시리즈도 손꼽고 있다. 물론 <별의 목소리> <최종병기 그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도 10대 소년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오직 인물의 내면이나 자의식을 그려내기 위한 내용인 것만도 아니고, 또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이런 ‘세카이계’ 작품들이 전부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각기 전부 다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로 묶어버리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다. 바로 그래서 ‘세카이계란 용어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지 않은가’, ‘세카이계란 말에서 당초 의도하던 바와는 달리 변질되어 버렸다’는 식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예를 들어 ‘오타쿠’라든지 ‘사이버펑크’ 같은 용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용어는 그 역사가 짧으면 짧을수록 ‘아직 논의되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그 정의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세카이계’는 그중에서도 지극히 짧은 역사(기껏해야 만들어진지 15년,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따지면 겨우 10년 정도) 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논의 중인 단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비평적으로 이 단어 및 이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고 있는 서적도 일본에 겨우 몇 권 정도 나와 있을 뿐이니 당연한 상황이기도 하다.


90년대의 아이콘 <신세기 에반게리온>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확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어쨌거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설명할 때에, ‘70년대 야마토, 80년대 건담, 90년대 에반게리온’이라고 각 시대별 대표작을 나열한 다음에 보통 이야기되는 것이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는 대표작이 없다’인데, 거기에서 ‘2000년대는 어떤 하나의 대표작이 아니라 세카이계가 대표적 장르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카이계가 유행했던 제로(00)년대 이후의 시대, 즉 2010년대에는 어떤 경향성이 존재하는가에 관해 마에지마 사토시는, 2010년대에는 심지어 장르조차도 아니고 니코니코동화(일본의 동영상 투고 사이트)에서 유래한 캐릭터 ‘하츠네 미쿠’를 비롯한 소위 ‘2차 창작’이나, 혹은 온라인게임이라든지 라인 메신저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가 유행한 것 아니겠는가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70년대 야마토, 80년대 건담, 90년대 에반게리온’이라고 예시하고, 2000년대에는 “특정 작품을 대표작으로 손꼽기보다는 ‘라이트노벨 원작’이라거나 ‘세카이계’라는 식으로 ‘장르’ 자체가 대표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나마도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작품은 물론이고 어떤 장르 자체가 붐이라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 혹은 양식 자체가 붐이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지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엉뚱한 주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펴보자면, 미술에 있어서의 ‘아르누보’라든지 영화에 있어서 ‘누벨바그’도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경향성을 통틀어서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지금 진행 중인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전’을 공동 주최한 체코 알폰스 무하 재단의 사토 토모코 큐레이터도 그런 말을 한 바 있다. 말하자면 ‘아르누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이론적 바탕을 가진 ‘예술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 당대에 유행처럼 번졌던 하나의 스타일, 몇몇 작가들의 작풍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이지 지금도 어떤 확정된 정의가 학계에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아르누보’의 의미가 인상파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용어와는 달리 그냥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라는 점, ‘누벨바그’ 역시도 영어로는 ‘New Wave’, 즉 그 당시 영화계에 있어서 새로운 물결을 형성했던 영화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오타쿠’나 ‘세카이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일본 서브컬처계에서의 상황과도 유사한데, 물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르누보든 누벨바그든 오타쿠든 세카이계든, 이 용어가 탄생한 지 기껏해야 수십 년,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다른 ‘클래식’한 학문적 용어만큼 학계에서의 논의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만들어졌던 당초에는 주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라든지 “이러이러한 비평가들이 그 단어에 관해서 이러이러하게 말했다”, 혹은 “맨 처음 그 단어를 만들어내었던/유행시켰던 사람은 실은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다”식의 논의만이 가능할 뿐이지, 학문적인 어떤 정립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또 세상 모든 언어에 있어서 공통적인, 매우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어떤 단어에 대해 항상 그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의도한 바대로 단어가 유포되는 것은 아니므로, ‘맨 처음 만들었던 사람의 의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의는 있을지언정 거기에서 그 단어를 모두가 ‘바로 그 의미’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비교적 근래에 유행한 용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일 뿐이고 어떤 확정적, 이론적인 공통 의견이 구축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카이계란 단어 자체도,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2002년 말에 인터넷의 어떤 이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던 용어이고, 필자가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를 만났던 2003년 초까지만 해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비평계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에 접어든 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2016년 지금 돌이켜볼 때 겨우 10년 조금 더 지난 용어라는 말이다. 2016년 10월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을 때 “세카이계 유행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인제 와서 출간되다니 너무 늦었다”는 식의 말도 나왔는데, 애시당초 이 용어 자체가 ‘겨우 1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그에 대한 비평서의 외국어판 출간이 이제 되었다는 것을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물론 ‘당대 비평’이라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본래 비평은 그런 ‘유행’이 지나간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행’으로서의 ‘세카이계’는 이미 흘러가 버렸다고 해야겠으나, 세카이계가 2000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 ‘서브컬처계’에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즉 현재 시점의 작품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90년대 이전 작품들로부터 어떤 유전자를 이어받았는지 등 ‘세카이계 비평’은 2010년대에 시작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2016년인 현재 시점에도 일본에 있어 ‘외국’인 한국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본 국내에서도 의미를 갖는 연구 주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란 책이 일본에서 2010년에 첫 출간된 이후, 2014년에 문고판으로 다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2010년대에는 무의미한 연구 테마’였다면 2010년도의 첫 출간은 몰라도 2014년도의 문고판은 출간되지 않았을 테니까.) 즉 ‘세카이계’는 ‘1990년대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문화로서, 2000년대 일본 서브컬처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유행’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문화 스타일이고, 지금 시점에서 2010년대를 ‘총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비평 분야에서는 「세카이계란 무엇인가」가 그 하나의 시도인 것이고(일본에서도 ‘세카이계’에 관한 연구나 비평에 있어서 주된 참고자료가 바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이다. 아즈마 히로키를 제외하면 세카이계를 비평한 평론가가 일본에도 그다지 많지 않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서로서 이 책만큼 넓고 깊게 소개한 평론이 드물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서는 바로 이 <너의 이름은.>에 대해서 ‘세카이계의 총괄’이라는 감상이 일본에서는 개봉 초기부터 이어졌다.



<별의 목소리>

■ <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

<너의 이름은.>은 분명히 ‘세카이계의 총괄’, ‘세카이계의 종점’, ‘세카이계로부터의 졸업’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내용이다. 작품이 국내에 막 개봉된 시점이니 자세한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으나, 직접 관람을 하고 나면 이 작품의 줄거리에서 전형적인 ‘세카이계’와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야말로 초기부터 ‘세카이계의 기수’라는 식으로 설명되곤 했다. ‘세카이계’라는 단어 자체를 설명할 때에, 항상 따라붙는 것이 <별의 목소리>의 첫 구절이다.

“세계(세카이), 란 말이 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세계란 것은 휴대전화의 전파가 닿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 휴대전화는 아무한테도 닿지 않는다.”
(<별의 목소리> 대사에서 인용·번역)


세카이계를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로 바로 직결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별의 목소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약간의 차이점은 존재할지언정) 분명히 ‘세카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의 경우, 종전과 같은 세카이계 작품인가 하는 질문에 관해서 대부분의 관객은 확답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말하자면 ‘세카이계를 바탕에 두고 있지만 새롭게 다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일본의 영화사 연구자 와타나베 다이스케(「이미지의 진행형: 소셜 시대의 영화와 영상문화」 저자)가 일본의 인터넷 미디어 「리얼 사운드」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카이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논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키워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세카이계’, 또 한 가지는 ‘미소녀게임’입니다. 나중에 기술하겠지만 이 두 가지는 상호 연관되어 있고, 소위 ‘제로년대(2000년대)’의 오타쿠 계열 컬처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즉 신카이 마코토라는 애니메이션 작가의 독창성, 신선함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로 중요한 점은 그가 제로년대라는 고유의 시대, 그리고 애니메이션 이외의 오타쿠 계열 콘텐츠라는 고유의 영역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출현한 ‘이레귤러(변칙)’적인 재능의 소유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지브리(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로부터 오시이 마모루, 안노 히데아키를 거쳐 호소다 마모루에 이르는 ‘2차대전 후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의 정통적 문맥이나 유산’을 사실은 거의 공유하지 않는, 말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돌연변이’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에 이번 <너의 이름은.>의 ‘역사적’ 대히트는 한편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에 있어 커다란 ‘절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략)
(와타나베 다이스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2016.09.08)에서 인용·번역)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를 호소다 마모루 등과 한 묶음으로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의 후계자’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비평계에서 몇 번 나온 이야기인데, 이번 <너의 이름은.>을 통해 그것은 더더욱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최근의 호소다 마모루에 이르기까지의 애니메이션 크리에이터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전원 종래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속에서 이력을 쌓아왔고 애니메이터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다. (호소다 마모루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 입사 시험을 치기도 했고 첫 직장으로 입사한 것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최고 정통 애니메이션 업체라고 할 수 있는 토에이애니메이션이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게임 업계 출신이고(첫 직장이 ‘Ys(이스)’ 시리즈, ‘영웅전설’ 시리즈로 유명한 니혼팔콤이었다), 독립한 이후에도 초기부터 미소녀게임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런 의미에서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난 감상으로서 “이것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 등 본인의 작가적 출신지에 자각적으로 회귀’한 것임과 동시에 ‘그 이후의 시대의 변화에도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 작품”(앞선 글에서 인용·번역)이라고 말한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몸이 바뀌는 소년 소녀

즉, <너의 이름은.>의 스토리 구조와 영상 그 자체는 지극히 기존의 신카이 마코토스러움, 즉 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적인 일면을 유지하고 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몸이 바뀐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타임 트래블’적 내용, 혹은 기억상실이란 모티프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소위 ‘주브나일’(청소년 대상의 소설, 주로 SF나 판타지 등의 장르문학이 많다. 원래 서구권에서 시작된 청소년 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최근 미국에서 유행한 ‘영어덜트픽션’ 장르와도 비교해볼 수 있는 장르이다.) 장르의 전형적인 내용이다. 물론 세카이계 작품이나 미소녀게임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설정이다. 당연히 이 각각은, 세카이계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도 흔한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소년 소녀의 몸이 바뀌면서 동시에 타임 트래블도 하면서 기억상실도 하게 되는’ 내용은 의외로 세카이계 작품이나, 혹은 게임이 아니고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반대로 일본 만화나 게임을 쭉 접해온 계층에게는 이것들이 거의 ‘클리셰’인 셈이고, 자세한 설명이나 소개 없이도 즉각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존에는 신카이 팬들의 대다수가 ‘10대~30대의 남성 오타쿠’(와타나베 다이스케의 앞선 글)였고 그것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에 원점을 둔 신카이 감독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는데, 이번 <너의 이름은.>은 특히 10대 여성 관객(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을 중심으로 대히트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어째서일까. 보통 이 정도의 메이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도 ‘패밀리 관객층’을 향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법이고, 호소다 마모루가 <늑대 아이> 등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포스트 지브리’로 주목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더라도 <너의 이름은.>의 이런 독특한 지향성은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에 관한 와타나베 다이스케의 지적은 매우 시사적이다. 약간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분명히 <너의 이름은.>은, 몇 번이고 지적했듯이 스토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지브리나 호소다 애니메이션처럼 ‘국민적 애니메이션’, ‘패밀리 대상’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과거 우리들 젊은 남성 관객이 지지했던 세카이계적 세계관이나 설정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나서 나는 결정적인 위화감도 느꼈습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세카이계적이면서도, 하지만 어딘가 세카이계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타키가 ‘세카이계적 나약한 소년’(중략)과는 달리, 그야말로 ‘포스트 제로년대적’으로 주체성을 갖고 행동하며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현실(리얼)에 충실한’ 캐릭터상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는 근래의 오타쿠 계열 콘텐츠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략) 구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2009년) 신지의 ‘캐릭터 체인지’도 완벽하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은 틀림없는 세카이계적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어딘가 과거에 봤던 작품들과는 다른, ‘세카이계라고 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튼간에 신카이는 이러한 ‘마이너 체인지’(*역주:크지 않은, 소소한 수준에서의 세부 수정)를 세세하게 쌓아올림으로써 이번에, ‘패밀리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국민적’인 규모의 대히트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너의 이름은.>이 갖는 획기성이 있는 것입니다.
<너의 이름은.>은 과거 미야자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처럼, 혹은 안노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의 무언가를 확실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의 계승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결정적인 ‘단절’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돌연변이’ 신카이가 만든 신작은, 글자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완전한 ‘돌연변이적’ 걸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돌연변이’=예외가 ‘오리진(origin)’=기원이 되어, 새로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앞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다이스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2016.09.08)에서 인용·번역)


바로 이런 식의 평론이 2016년 8월 26일 <너의 이름은.> 개봉 이후 이어졌던 것이다. (위 평론도 개봉일로부터 보름도 채 안 되어 게재되었다. 아무리 인터넷 매체라고 하더라도, 필자가 집필한 것은 개봉일 거의 직후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존 신카이 감독 작품의 주인공들(특히 남자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오타쿠’적인 성격(외톨이이고 자기완결되어 있는 인격체)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로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개체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기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일본 만화적 캐릭터’였던 것과 비교해볼 때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선 심지어 ‘정치’(정치적이란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니라, 말뜻 그대로의 ‘정치=사회나 조직에서 상호 간의 이해 조정’)까지도 그려져 있는 것이다. 즉 외계인이라든지 ‘닫혀진 세계’ 속에서의 ‘오타쿠적 세카이(세계)’에서 벗어난, 그야말로 ‘포스트 에반게리온’으로서 ‘제로년대의 시작을 알렸던 세카이계의 기수가 세카이계에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서 <너의 이름은.>은 초기부터 (대중적인 히트와는 별개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그 부분을 한국에서도 확실하게 알리고 싶어서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와 <너의 이름은.>

또 한 가지, 필자가 <너의 이름은.>에 관해서 이 글을 쓰고자 생각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 작법론에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의 극장용 팸플릿 제2탄(2016년 12월 9일/토호 영상사업부 발행)에 수록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직접 풀어낸, 영화 <너의 이름은.>」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신카이 감독이 11월 5일 나가노 현의 도서관에서 개최한 강연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 ~현대 이야기의 역할~」을 글로 옮긴 것인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토리텔링 작법에 관해 스스로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만들 때에는 스토리의 콘셉트를 몇 줄 정도로 표현하는 ‘로그라인’이란 것을 맨 처음 생각하는 법입니다만, <너의 이름은.>의 로그라인은 ‘꿈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나중에 결국 현실에서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남을 가지고, 한때 헤어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만나게 된다는. 그런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구조로서, 강력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로맨틱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너의 이름은.> 극장용 팸플릿 vol.2 Collection of interview」에서 인용·번역)


여기에서 신카이 감독이 말한 ‘로그라인(log-line)’이나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일본의 평론가이자 만화 스토리작가인 오쓰카 에이지가 쓴 스토리텔링 작법서 「스토리 메이커」와 「캐릭터 메이커」 그리고 「이야기 체조」 「이야기의 명제」(한국어판 2013~2015년/북바이북 발행) 등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선 오쓰카 에이지는 로그라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처럼 플롯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을 프레미스 혹은 로그라인이라고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부르는데, 좋은 시나리오는 명확한 로그라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통 일컫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로그라인은 시나리오의 근본을 규정하기 때문인데, 그 정리 방식에 따라 플롯이 펼쳐져 갈 방향이나 작품의 테마가 크게 바뀌는 것입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그렇다고는 하나 이 워크숍이, “우정을 테마로 삼아 스토리를 만들어봐라”는 식으로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만화잡지 「소년 점프」 에서는 독자 앙케이트를 통해 선정된 ‘우정’, ‘노력’, ‘승리’라는 3가지 키워드를 테마로 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공이 목적을 향해 ‘노력’하고, ‘우정’의 도움을 얻어 ‘승리’한다”는 스토리를 지탱하는 원리 원칙일 뿐이다. 블라디미르 프로프식으로 말하자면 ‘캐릭터의 행위의 3연속’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화시킨 이야기의 구조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캐릭터 조형이나 스토리라인 만들기의 지침이기도 하다. 「소년 점프」의 이 3가지 키워드를 통해 유도되는 문장은, 영화 업계에서 ‘프레미스’라고 부르는 용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유의어로 ‘로그라인’, ‘콘셉트’, 그리고 ‘테마’가 있는데, 시나리오 입문서에서도 실제 현장에서도 혼동되어 사용된다는 인상이다. 이런 식의 ‘정의’가 있기는 있는 듯하다.
프레미스, 테마, 콘셉트, 로그라인 등과 같은 용어는 보통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보통은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착상)이나 토픽(사건), 2~3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의 뼈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혼동하기 쉽지만 ‘프레미스’와 ‘테마’는 스토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란 의미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콘셉트’는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나 토픽을 의미하고, ‘로그라인’은 하나 혹은 두 문장으로 ‘콘셉트’의 요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하겠다. ‘프레미스’와 ‘테마’는 스토리의 내부 깊숙히 담겨진 메시지를 의미한다.
(「이야기의 명제」에서 인용)


그다음,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중략) 여기에는 사실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 경계를 넘어서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이야기의 기본입니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소녀가 이계(異界;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이죠.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온 다음, 무언가가 약간 변화되어 있다는 것. 거기에서 제가 연상하는 것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담력 시험입니다. 담력 시험을 끝낸 다음에, 스스로가 무언가를 뛰어넘어서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사람은 변화하는 법이죠. <너의 이름은.>은 그 모티프를 반복해서 집어넣음으로써 타키와 미츠하가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중략) 사람이 태어난 다음에 처음 겪게 되는 놀이 ‘이나이 이나이 바아(엄마 없다 놀이)’도 말 그대로 갔다가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사라짐으로써 다른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다음 순간에 어머니 얼굴이 다시 나타나면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때 이미 그 놀이를 한 아기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변화되어 있죠. 그것이 성장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존재의 구조 그 자체이기도 한데, 관객들은 어떤 꿈을 보기 위해서, 특별한 꿈의 계시를 얻기 위해 영화관에 가고, 변화되어서 돌아옵니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너의 이름은.> 극장용 팸플릿 vol.2 Collection of interview」에서 인용·번역)


‘이나이 이나이 바아’란 것은 일본에서 ‘엄마 없다’ 놀이를 지칭하는 명칭인데, 아이 앞에서 본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추고 ‘없다 없다(이나이 이나이)’라고 말한 다음 ‘바아’라는 말과 함께 얼굴을 드러내어 아이한테 보여주는 행위이다. 영어권에서 말하는 ‘Peek-a-boo’이고, 한국에서는 ‘얼레리 까꿍’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 ‘엄마 없다’ 놀이를 통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점(「스토리 메이커」 참조),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예를 들고 있는 것도 오쓰카 에이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너의 이름은.> 일본판 팸플릿 1편 / <너의 이름은.> 일본판 팸플릿 2편

제 1장 이야기의 기본 중 기본은 ‘갔다가 돌아오기’다
이야기의 문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해주십시오. 하나는 ‘결락된 것이 회복된다’는 패턴. 또 하나는 ‘갔다가 돌아온다’는 패턴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이 장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의 문법’인 ‘갔다가 돌아온다’에 관해 이해해두고자 합니다.
‘갔다가 돌아온다’는 구성이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패턴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 원작으로 유명한 J.R.R. 톨킨 저 「반지의 제왕」의 번역자로 알려져 있는 아동문학자 고 세타 데이지입니다. 세타는 갔다가 돌아오는 구성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고도 불렀습니다만,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톨킨 작품 「호빗」의 본래 타이틀 「The Hobbit or There and Back Again」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중략) 톨킨의 대학 동료였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옷장 안에 있는 나니아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내용이 기본 줄거리입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갔다가 돌아온다’는 패턴에 있어서, 주인공은 반드시 원래 있던 장소에 그저 돌아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있던 장소와는 다른 장소로 돌아가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문법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중략) 세타는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우선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발달 과정에 있는 그 두뇌와 감정에 따르는,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라고 지적하고서,
(중략)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경계선을 넘어 저쪽 편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계선은 작중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경계선일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는 앞으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작품세계 안에 하나의 경계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 주인공이 ‘저쪽 편’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 ‘이야기’의 가장 기본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한 이야기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문법을 교묘하게 사용한 작품이 많은 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터널 저쪽 편, 그리고 다리를 건넌 다음에 있는(물론 터널과 다리가 경계선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저쪽 편 세계의 여관에 치히로가 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또한 저쪽 편 세계에 간 후에도 하쿠를 구하기 위해 가오나시와 물 위를 달리는 열차를 타고 제니바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스토리 메이커」(오쓰카 에이지/북바이북) / 「이야기의 명제」(오쓰카 에이지/북바이북)

사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법론이 오쓰카 에이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필자의 상상만은 아니다. 실제로 필자는 과거, 오쓰카 에이지 본인에게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스토리 메이커」 등을 읽고서 작법론을 배웠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카이 마코토가 처음으로 오쓰카 에이지의 스토리텔링 이론을 도입했던 작품은, 실은 <너의 이름은.>이 아니라 2011년도 작품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나 일본에서나 검색만 조금 해보더라도 비판적인 관객 평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전까지 어느 쪽인가 하면 SF와 ‘세카이계’에 기반을 둔 작품이 많았던 신카이 마코토가, 갑자기 미야자키 하야오 + 스튜디오 지브리 풍의 ‘판타지’를 그렸다는 점, 게다가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물이나 스토리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적으로’ 지브리 풍을 연상케 되는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고, 또 오쓰카 에이지에게도 자신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작법론을 공부하고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직접 전달했으니만큼, ‘일부러’ 그런 내용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때 작법론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일까?

우선, 신카이 감독 자신이 나름대로 그 시점에 작품적인 고민이 많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2년 <별의 목소리>(25분), 2004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91분), 2007년 <초속 5센티미터>(63분)까지, 장편을 만들기 시작한 후로도 적은 수의 스태프만으로 만든 것 치고는 나름대로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하던 신카이 마코토가 4번째 장편인 <별을 쫓는 아이>(116분)는 2011년, 전작으로부터 4년 후에 발표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작품 제작에만도 2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이 다시 4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의 2013년 <언어의 정원>, 그리고 2016년도에 다시금 107분의 장편인 <너의 이름은.>에 이르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본인도 여러 번 말하고 있듯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창작론을 배경으로 갖고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초기에 만들었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비롯한 단편 작품에서 화제를 모았고, 처음 만들었던 극장용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가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갑작스럽게’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그런 ‘밑바탕’이 없다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추한다. 그런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상당히 초기부터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호평했던 평론가였고, 그런 평론가가 작법 이론서를 여러 권 출판했으니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스토리 메이커」를 비롯한 스토리텔링 이론서를 읽으면서 그 작법론에 수긍을 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이론적 바탕을 도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별을 쫓는 아이>의 내용은, 일본신화의 이자나기·이자나미 신화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아내 에우리디케 이야기 등, 그야말로 오쓰카 에이지가 「스토리 메이커」 등 작법서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와 세계의 민담·신화를 거의 그대로 도입한 내용이었다. 판타지적인 스토리 역시도 앞서 「스토리 메이커」에서 예시되어 있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 「나니아 연대기」와의 연계성도 엿보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 시점에 신카이 마코토는, ‘본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이론적 바탕을 공부하고자 노력’했고, 그에 따라 전 세계의 민담과 신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 있는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기초 이론과 할리우드 영화 등에서 보편적인 ‘로그라인을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 작법’에 맞춰서 작품을 만들고자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첫 번째 시도였다 보니, 아직 제대로 본인의 스타일로 제대로 ‘체화(體化)’시키지 못한 결과로서 그처럼 관객들의 비판을 받았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앞선 <너의 이름은.> 팸플릿의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이론에 확신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 작법론을 금방 포기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이번 <너의 이름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너의 이름은.>은, 본인도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작품 전체의 스토리 구조가 기본적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적인 구성이다. 거기에 <별의 목소리>로부터 이어져 온 세카이계로서의 콘셉트 역시도 (앞에서 기술했듯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중요한 변화를 거치면서도) 계승하고 있다. 말하자면 본인의 지금까지의 작품 활동 전체가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그냥 그대로 표출한 것이 아니라, <별을 쫓는 아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로, 기존의 세카이계에 종지부를 찍는 듯한 또 다른 작품 세계로, 새롭게 완성해낸 것이 바로 <너의 이름은.>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너의 이름은.> 한국판 런칭포스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1인제작 애니메이션’이라는 신화

마지막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여전히 소위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개되고 있는 국내의 현실에 대해 몇 가지만 첨언하고 싶다. 필자는 지금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두 번 인터뷰를 했는데, 그 첫 번째는 「콘텐츠 코리아」 2001년 9월호에 기고하기 위해 행했던 것이었다. 이 시점은 그가 <별의 목소리>(2002년 2월 2일 개봉)를 완성하기도 전이었는데, 이후 오쓰카 에이지나 아즈마 히로키 등의 평론가와, 일본의 각종 애니메이션 잡지와 매스컴이 신카이 마코토를 주목하면서 국내에도 ‘1인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에 대해 초기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무엇보다도 필자부터가 당시 2001년 9월호에서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 가장 먼저 설명한 문장이 ‘배경 음악과 여주인공 성우를 제외한 나머지를 완전히 혼자서 만들어낸 4분 46초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실사 영화 <부산행>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크리에이터가 된 연상호 감독이, 당시 <지옥>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면서 신카이 마코토의 제작 방식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당시 「CG랜드」 등의 잡지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등을 통해 연상호 감독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가 1인 제작으로 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25분짜리 <별의 목소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계약’을 해서 ‘소속 회사’(지금도 소속되어 있는 주식회사 코믹스웨이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아이돌 지망생이 프로덕션과 계약해서 연습생으로 활동하며 데뷔를 목표’로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신카이 감독의 경우 이미 회사원으로서의 경력이 있었고, 소속사에서 그의 단편 작품을 보고 계약했던 것이니만큼 소속사가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금(생활비나 교육비 등)을 주었다기보다는 그에게 작업 의뢰를 받아주면서 일이 끊기지 않도록 했던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보면 그 당시 신카이 감독의 경우 소속사를 굳이 둘 필요 없이 프리랜서로 일했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신카이 감독은 CG 관련 수주를 받아 프리랜서 직업인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만의 오리지널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굳이 소속사에 소속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당시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계열과는 조금 사정이 달랐고, 직접적인 참고가 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신카이 감독과 같은 길을 걸으려면, 우선 소위 작가주의적인 지향성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니까. 물론 이 말은 작가주의적 지향성을 버려야만 신카이 감독처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카이 감독은 장편을 만들면서 쭉 본인의 작가적 지향성을 놓지 않아 왔고,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미소녀게임 오프닝 애니메이션이라든지 기업의 CF애니메이션도 수주받았고, 소속사와 계약하는 등 (그것은 즉, 작가 본인의 수입을 소속사와 분할해서 나눠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소속사와 계약하고 매니저를 두는 연예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식 상황에서 보자면 지극히 상업주의적이라고 여겨지게 될 시스템에 속하는 것을 신카이 감독은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그런 상황을 쭉 지켜보아 온 입장에서, 신카이 감독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 신카이 감독과 같은 길을 걷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실감이 드는 일도 많았기에, 그 당시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쪽 상황에서 ‘한국의 신카이 감독’의 등장을 바라기는 쉽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찾는 크리에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연상호 감독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양쪽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며 그런 길을 찾아낸 것 같아,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더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지적해왔던 바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업계의 상황을, 갖가지 소식과 뉴스를 통해 바로바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기본적인 시스템도 거쳐 온 역사도 업계의 온갖 상황도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가 없이 표면적인 뉴스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심지어는 직접 일본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아 일러스트 작업을 하거나 만화 작품을 연재하는 경험을 갖고서도, 일본 업계에 대해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경험담을 말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정작 일본 업계에서 더 오래, 더 폭넓게 활동해왔을 ‘일본의 작가들’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일본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 작가’가 말하는 케이스가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 경험담을 단순히 말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일본 업계는 이렇다”는 식으로 업계 전체를 논하는 정보로서는 주의가 필요한 경우도 많을 텐데, 개인적 경험담을 일반론으로 너무 쉽게 치환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 유행했던 ‘신카이 마코토의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는 신카이 감독이 꼭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또 1인 제작을 했던 때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국내와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신카이 마코토를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 국내에 소개했던 적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꼭 확실하게 언급해두려고 쭉 생각해왔다.)

아무튼 이런저런 논점들이 많았는데, 어쨌거나 이번에 <너의 이름을.>을 보고 ‘일견 대중적이지 못하고 마니아 취향이기 쉬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고, 또 그 도달점이 이처럼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2017년 개봉 이후 관객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으나, 한국 관객들 역시도 오랫동안 신카이 감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왔으니만큼 좋은 반응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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