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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없는 그림책

글:김일태(조선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부 학부장) / 20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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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없는 그림책

영상자료원에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지난 추천 애니메이션에 이어 애니메이션 칼럼을 의뢰한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려는 생각으로 그 제안을 수락하고, 원고를 정리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물론 원고가 아닌 노트북을 펼치고...

여러 가지 글을 써 보았지만 칼럼은 처음이라 우선 글을 쓰기에 앞서 ‘칼럼’이라는 형식에 대해 사전을 빌어 정리하여 보았다. ‘칼럼(column)’이라 함은 신문·잡지 등에서, 시사 문제· 사회 풍속 등을 짧게 평하는 특별기고. 또는 그 기고란으로 ‘기고란’, ‘시사평론’, ‘시평’으로 순화되었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지난 추천 애니메이션에 이어 좀 더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의견을 정리하려고 ‘내용과 형식’을 좀 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주제를 정리하다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나름대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조금은 부담을 덜고 자유롭게 정리하는 수필 형식을 덧대어 쓰는 것이 글을 쓰는 필자에게도, 그리고 글을 읽어 주실 독자들에게도 좀 더 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아들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4명이다. 필자, 그리고 아내, 첫째인 아들과 막내인 딸이다.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들은 지난주에 중간고사가 끝났고 필자가 허락한 일주일간의 자유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는 온라인 게임을 하고 주말에는 텔레비전의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월, 수, 금요일에는 영어 학원을 다녀야 하고, 화, 목요일은 수학 과외를 해야 한다.

최근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대도시의 많은 초등학생들이 4~5학년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월 수 금요일 반과, 화 목 토요일 반, 주 6일간 영어와 수학과목을 번갈아 가면서, 학교 공부와는 별도로 학원에서 3시간 정도의 추가공부를 하고 있다. 숙제도 많다. 그래서 중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학원 숙제를 하기도 하고, 미술과 체육시간에 자율 학습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이 상황이 물론 우리나라 모든 학교와 학생들에게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도시의 많은 학교와 학생, 그리고 학생들이 있는 가족들이 겪는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와 수학에 대한 학업의 스트레스가 많은 탓인지 독서보다는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많고, 자연 친구들과 교류 및 야외 활동이 적다보니 운동량도 적다. 그래서인지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시간이 되면 많은 텔레비전을 벗 삼아 어눌한 언행과 단순한 몸 개그 등으로 치장된 오락성 방송들을 자주 보고 있다. 최근 감각적인 화면구성과 편집, 빠른 화면전환 기법과 반복적인 효과 음향 등으로 시청자들이 내용의 진행 속도에 쉽게 끌려가도록 구성된 방송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여러 오락성 방송들은 문학이나 영화가 갖는 ‘독자나 관객의 스스로 이야기 만들기(연상법)’가 무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로 상상력과 연상에 대한 최소한의 두뇌 활동도 거부하고 영어 수학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슬랩스틱 코미디로 대신 채워 그것을 감내하려는 반작용으로 이해되어진다.

10여 년 전, 다섯 살이던 우리 아들을 위해 동화책을 한 권 살까 해서 서울의 교보문고를 들렀다가 흥미로운 동화책을 한 권 구입한 일이 있다. 이은홍 작가의 ‘글자 없는 그림책’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에 눈길이 쏠려 책 내용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말과 글 없이도 그 뜻이 충분히 전해졌고, 그림만으로도 독자들이 나름대로의 상상과 연상을 할 수 있도록 한 창작의 발상이 참 좋았다.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겸 동화책 작가로 잘 알려진 영국의 레이몬드 브릭스(Raymond Briggs)의 작품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연상을 위해 ‘그림만으로 된 어린이책’을 여러 권 창작하였다.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레이먼드 브릭스의 원작 동화 《꿈과 사랑이 담긴 나라로의 초대》는 1982년 영국의 런던 TVC에서 다이안 잭슨(Dianne Jackson)감독에 의해 대사 없는 단편애니메이션《스노우 맨(The Snowman)》으로도 제작되어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부모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작품이 되어 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을 구입한 지 10여 년이 지나고, 작가 이은홍선생과 우연히 한 달 전 연락이 닿아 우리 학교에서 특강을 할 기회를 가졌다. ‘술꾼’이라는 만화책으로, 그리고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알려진 만화가이자 동화일러스트레이터인 이은홍 작가는 충북 제천 시골의 대안학교 학생들에게 만화를 지도하면서 ‘만화를 어떻게 그리는가’에 대해 3가지로 요약해서 지도한다고 하였다. ‘첫째, 마음대로 그려라, 둘째, 멋대로 그려라, 셋째, 정성껏 그려라’이다. 이 내용은 뻔한 내용 같지만 함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데, 찬찬히 풀이해보면 참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마음대로’라는 내용은 생각 없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그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그리라는 뜻이고, ‘멋대로’라는 내용은 자신의 색깔과 예술적 품격을 나타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정성껏’이라는 내용은 그림을 그릴 때 최선을 다해 그리면 만화가 제대로 그려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특강이 끝나고 질문시간이 되었지만 질문이 없어 몇 학생에게 질문을 유도했다. “산골에서 아들 때문에 작업이 어렵지는 않은지요?” 작가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들이 우는 소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삶이고 작업거리이지요. 작업할 것이 너무 많아 고민입니다. 하하하...”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과정이 어렵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본인의 생활이고 즐거움이고 기쁨이면서 이를 토대로 작품들을 만들다보면,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러한 배경과 분위기와 역량과 느낌들이 녹아있기 때문에 독자와 관객들에게 보다 분명하고, 깊숙이 파고드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은홍 작가는 부인, 아들과 함께 충북 제천 산골에 와서 7년 전부터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는 7가구가 있고 아들은 가나안 대안학교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음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과 가족들의 ‘바램’대로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아들의 장래희망은 요리사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꿈은 만화가와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모두가 창의적인 직업들이다. 그러나 정해진 학원 공부시간이나 주어진 과제 외에 나름대로의 자율적 생각하기에는 조금 인색하다. 좀 더 여유 있는 생활과 생각 속에 창의적인 발상과 창작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바라는 살기 좋은 세상, 최고의 인생이 오직 영어와 수학전문가들이 넘쳐나는 천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인적인 교육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어와 수학 공부달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20년 후의 대한민국이 염려되는,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이 아쉬운 시대이다.

오랜만에 천천히 흘러가는 스노우 맨의 주제가 "Walking in the air"를 향긋한 녹차 한 잔을 마시며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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