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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면 보이는 것들

글:김일태(조선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부 학부장) / 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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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면 보이는 것들

우리 집 수고양이가 집을 나갔다.

사람만 봄을 타는 것이 아니라 생물들이라면 모두 계절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모양이다.

요즘처럼 유독 변덕스러운 봄날, 아침에는 멋진 꽃봉오리를 열었다가 그 향기 시샘하여 찬바람이 몰려오고 뒤질세라 낮에는 햇볕이 번갈아 내리쬐면 이솝의 ''햇빛과 바람의 외투 벗기기 시합’ 우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변덕스런 날씨 탓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호흡기계통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난여름에는 건강에도 좋고, 기름 값도 아끼고, 무엇보다도 낭만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출퇴근용 자전거를 가슴 설레며 구입했었다. 그런데 웬걸 여름에는 땀난다고, 겨울에는 춥고 눈길에 미끄러진다고, 그리고 여러 날들을 업무로 인해 양복에 넥타이 매는 날이라고, 마누라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자전거를 너무 오랫동안 모셔두었다.

그래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원류를 끼고 도는 안동의 강변 뚝방길을 따라 길게 널어선 미루나무와 함께 천천히 유람하는 자전거 소풍은 -마이클 두독 비트의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 흐르는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영향을 받은)을 떠올리며- 이 계절에 즐기기 좋은 여가생활 중의 하나이다.

요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또한 그렇게 빨리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도 차창 밖의 풍경을 즐기기보다는 스마트 모바일 기기에 눈을 맞추고 있는 모습들이 다반사이다. 사람들은 그 작은 기계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 이렇게 빠른 디지털 시대의 무한경쟁 패러다임에서 우리들은 사실 얻는 것 이상 많은 것들을 잃어 가고 있다.

무한경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리사를 꿈꾸는 우리 아들놈인데, 이제 고3인 된 아들의 고등학교 교과과정에는 미술과 음악이 1학년에 잠깐 포함되어 있고 2학년부터는 수업시간이 일체 없다고 한다. 한편 수학과 영어의 반영 가중치가 70% 정도로 특히 높고, 2000여 개가 넘는 전형 방법을 가진, 춘추전국시대 초한지와 삼국지보다 더 복잡 미묘한 입시전형 속에서 인생의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은 과연 우리나라의 어떤 미래를 창조하고 담보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은 아내의 안동 대학직장에 맞추어 1997년부터 안동에서 정착하고 있다. 그러다가 필자가 2000년 학교직장을 광주로 옮기면서 안동-광주를 주말로 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벌써 15년 차로 접어들고 있다.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편도 5시간 30분, 왕복 11시간으로 그리 짧지도 녹록지도 않은 여행이지만 애로사항을 극복하는 나름대로의 지혜를 찾았다. 만화책 2권, 애니메이션 영화 4편, 상상력과 몽상을 동원한 필자의 실험애니메이션 작품구상이 주말 여정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수확이다. 주변에서 ‘힘들지 않느냐?’고 묻거든 ‘가끔씩 만나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것도 나름 행복이지요!’라면서 둘러 웃어 대답한다. 어려움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부족함을 넉넉함으로 풀어내는 슬기로운 생활의 역설적 치환이라고나 할까···

자동차를 타고 빨리 달리면 눈앞으로 지나가는 많은 장면들이 플립 북처럼 기억보다는 망막에 남겨진 화학적 흔적으로 머릿속에 머무를 시간도 없이 쏜살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천천히 걷거나 나의 힘씀에 반응하는 자전거 하이킹은 장-루프 펠리시올리와 알랑 가그놀의 장편애니메이션 <파리의 도둑고양이>(2010)에서 재현되는 나른한 오후의 한 장면처럼 빨리 달리면 볼 수 없는 다양한 장면들을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즐길 수 있게 해서 참 좋다.

혹은 따갑게 달아오른 검은 아스팔트 신작로를 뒤로하고, 병산서원 나들목 비포장길을 유유히 걷자면 길가 숲 속의 새소리 벌레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우고, 아카시아 향 진득하게 코를 적시고, 픽셀의 망점에 충혈된 눈을 시원하게 해주면서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인지’... 순간 자연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격변의 21세기 디지털 세상이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평소 집 앞 잡초로만 여기던 초롱꽃잎 한 움큼 따다가 샐러드로 한 접시 해서 먹고, 식사 후에는 직접 드립한 커피 한잔 끓여 마시고, 민들레 홀씨 따다가 구름 속으로 날려 보내는 낭만과 여유를 가지면서, 퇴근 후에는 맑고 청량한 하늘 아래 연둣빛으로 발색하는 푸른 산과, 청매화 벚꽃 만개한 들판을 반딧불 무리처럼 잔물결에 예쁜 빛깔로 반사하는 강변과 천변으로 나들이 나가, 자전거 타기와 산책으로 다문 몇 시간만이라도 오랫동안 웹툰과 애니메이션에서 연상해오던 지친 상상들을 자적한 운치로 천천히 즐기시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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